'중쇄를 찍자'라는 일본 드라마를 즐겁게 봤었다. 월간 만화잡지의 초보 편집자로 입사한 주인공이 좌충우돌, 우당탕탕 성장하는 내용. 평소 선망하던 출판계를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고독한 미식가 아저씨가 편집장, 꽃미남 시절의 '오다기리 조'가 외모와 실력을 겸비한 부편집장으로 나오는데, 그래도 익숙한 얼굴이 있어 초반 몰입에 도움이 되었다. 유도선수 출신의 주인공이 '정력선용(精力善用), 자타공영(自他共榮)'이라는 문구를 책상에 붙여두고 있었는데, 드라마에선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올바른 곳에 사용하며 타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감사해야 한다. 서로의 신뢰를 키우며 함께 도우며 살아갈 수 있다'로 번역되었다. 여덣글자의 한자 치고는 너무 긴 해석인 듯 하지만, 뜻이 좋으니 뭐. 아무튼. 씩씩하게 노력하는 주인공의 순수한 열정이 좋아서 저 문구가 나온 장면을 한동안 카톡 프로필로 설정할 정도로 푹 빠져서 지냈었다.
[정력선용. 자타공영. 최선을 다해서 멋지게 살자]
하지만 지금은 소소한 선행으로 운을 모아서 정말로 원하는 곳에 쓸 수 있다고 믿고있던 출판사 사장님이 더 선명하게 기억난다. 복권당첨 따위에 운을 낭비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장. 그의 소망은 그가 관여한 책들이 중쇄를 찍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사장님은 매일매일 성실하게 운을 쌓는다. 쓰레기도 열심히 줍고, 길가의 전단지도 먼저 손 내밀어 받으면서. '중쇄를 찍자'의 출판사 사장님께서 선행으로 운을 쌓는 편이라면, 나는 감당할만한 불운을 적립하며 운을 바라는 쪽이다. 드물게 한 번씩 로또가 오천 원에 당첨되는 날에는 오히려 살짝 불안해진다
[한 권이라도 많은 책을 독자에게 전하는 것만 생각하는 사장님]
'1등이 아니라면 차라리 걸리지 않기를. 그리하여 나의 다른 불운을 대신해 주기를.' 정도의 마음인 건데, 이런 사고시스템이 생각보다 정신 건강에 유용하다. 자잘한 일상의 실패. 이를테면, 택배상자가 옆동에 도착해 있거나, 쥐어박고 싶은 얌체운전자를 만나는 상황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화가 나지만, 작은 불운을 쌓다 보면 뭔가는 좋은 게 있을 거란 믿음이 결국에는 위로가 된다. 차곡차곡 쌓인 무언가는 언제나 나를 더 높은 곳으로 대려다 줬었으니까. 불운으로 이어진 줄 어딘가에는 행운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실제로 대학교 입학이나 취업, 결혼같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에서는 운의 도움을 크게 받기도 했었다. 그래서 언젠가 '나의 소소한 불운을 드릴게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써보고 싶다. 소중한 누군가에게 행운의 차례를 양보하는 일종의 판타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