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카고> 리뷰
비가 내린다. 창문을 열어놓고 글을 쓴다. 재즈가 방 안에 은은하게 울린다.
적막을 깨는 어두운 재즈와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사이렌 소리, 그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한데 어울린다. 책상에 켜놓은 스탠드의 불빛까지. 언제나 바쁜 뉴욕에 나만의 작은 둥지가 생긴 것이다.
뮤지컬 <시카고>는 또 다른 뉴욕이다. 이 뮤지컬을 보고 거리로 나온 날이면 어김없이 걷고 또 걷는다. 록시 하트의 노래 한 구절을 입에 넣고 녹여먹으며 센트럴파크에 앉아있거나 소호를 지나 배터리 파크에 다다를 때도 있었다. 처음 이 뮤지컬을 보고 굉장히 화가 났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왜 이제야 이 뮤지컬을 보게 되었을까. 2. 세상에는 똑똑한 인간들이 너무 많다. 3. 그 똑똑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엄청난 것들을 이렇게 앉아서 볼 수밖에 없다니!
한국에서 두 번, 뉴욕에 도착한 이후로 10번을 넘게 본 뮤지컬이 바로 <시카고>다. 환상의 나라의 퍼레이드처럼 화려한 무대나 의상은 없다. 대신 밴드를 무대 위로 끌어올리고 그 사이로 배우들과 댄서들이 등장한다. 배우들은 장면이 끝나도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관객들의 흥을 돋우기도 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한다. 의상은 올 블랙. 장면이 바뀌어도 옷을 바꿔 입거나 분장을 새로 하지 않는다. 배우들은 2시간 40분의 러닝타임 동안 오로지 무대 위에서 재즈와 춤 그리고 기막힌 연기로 존재한다. 이것이 나를 뮤지컬 <시카고>에 빠지게 한 가장 큰 이유다.
진심으로 짜증이 나,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만든 엄청난 것들을 보고 있어야만 한다니!
뮤지컬 <시카고>의 안무가 밥 파시 (Bob Fosse, 1927-1987)는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유명하고 기발하며 창의적인 스카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브로드웨이에서 전설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낡고 발레적인 미국 뮤지컬계의 요소들을 타파하고 배우와 안무가, 연출가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파시의 현대적으로 화려하면서도 선정적인 예술세계는 어린 시절 삼류 단막 배우였던 아버지를 따라 접하게 된 스트립댄서들에 대한 추억들이 일종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화려하고 육감적인 스트립 댄서들의 몸짓을 뮤지컬 무대에 녹여낸 그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는 후에 사람들로부터 공간의 미학이 담긴 마술 같다는 평을 듣는다. 또한 비평가들은 파시의 안무가 타고난 재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탐구와 새로움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기인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파시는 이러한 경험은 다른 배우들도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데 있어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첫째, 작은 규모의 무대 공연부터 브로드웨이 쇼에 이르는 그 자신의 광범위한 경험이 그것이다. 둘째, 그는 최고 배우들을 찾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그는 배우에게서 단순한 얼굴이 아닌 성격을 찾으려고 했으며, 배우들은 단지 야망뿐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 안에 춤을 갖고 있는 사람 이어야 했다. 또 다른 그의 성공요인은 그가 항상 주연 배우들은 물론 코러스의 이야기까지 귀담아들을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그들의 아이디어를 시험해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이미 유명인사였음에도 항상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고 수용할 것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춤이 단순히 노래에 장식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곡의 완전한 일부여야 한다는 그의 결의와 노래를 목소리뿐만 아니라 춤이라는 매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욕구가 그를 특별하고 성공적인 인물로 만든 것이다.
* 출처: 네이버 인물사전
공연이 시작되고 앙상블 가운데 두 명 정도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록시 하트가 나올 타이밍이었다. 검은 머리를 단정히 올린 록시는 익숙했다. 그리고 그녀가 첫 넘버를 부를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대 위에서 붉은 입술로 노래하는 그녀는 바로 '비앙카'였던 것이다! 국문학도 시절, 2시간이 넘는 통학시간을 함께 해준 영상의 주인공이었다. 무심한 듯 툭툭 내뱉는 말투와 애드리브가 매력적인 배우다. 그리고 록시 하트와 벨마 켈리의 구세주인 마마가 등장하는 순간, 두 번째 함성을 질렀다. 뉴욕에서의 첫 <시카고>에서 마치 팝송을 부르는 듯한 마마의 모습에 실망했는데 오늘의 마마는 상상 속에서 그리던 ‘걸쭉한’ 마마였다. 목청 크게 지휘자를 소개하고 자유롭게 말하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노래가 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속이 다 시원했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 본 공연의 마마와 록시는 앙상블에 합류해 공연하고 있었다. 첫날 본 공연은 커버들이 하는 공연이었던 것이다.
어제의 <시카고>는 죽이 맞아 돌아가는 콤비들과 그 합에 더욱 신이 난 앙상블 배우들의 '뫼비우스의 띠' 같았다. 서로에게 물리고 물려가며 끝까지 흥에 겨웠다. 비앙카는 2002년 록시 역으로 데뷔를 했고 벨마로 분한 배우는 2001년 초연부터 함께한 배우라고 하니 얼마나 오랜 기간 함께 했는지 안 봐도 뻔한 것이다. 특히 벨마는 첫 공연보다 훨씬 더 과장된 애드리브를 많이 던졌고 록시의 작은 제스처에도 관객들은 와글와글 웃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보듬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콤비는 대단했고 덩달아 빌리 플린, 에이 무스, 마마까지 들뜨지 않고 편안히 그리고 즐기는 듯했다.
Oh, Thank you so much, Sweetie.
공연이 끝나고 사인을 받을 요량으로 프로그램북과 시디를 샀다. 오늘의 캐스트가 한국처럼 프로그램북에 실릴 줄 알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로비에 붙어있는 이름이 프로그램북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쩔쩔 매고 있는 나에게 표를 체크해주시던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오늘 공연한 배우들을 찾고 있는데 여기에는 없는 것 같다고 하자, 할아버지가 이건 오리지널 캐스트고 앞에 따로 끼워진 시트가 있을 거라고 말해주셨다. 그러면서 옆에 다가와서 얘는 록시고 얘는 벨마란다, 하며 설명해주셨다. 그래서 아, 그럼 오늘 캐스트는 여기 없나요? 했더니, 이 프로그램북에 있어, 하며 찾아주셨다. 나는 신이 나서 오늘 본 캐스트가 정말 좋다, 사실 오늘이 2번째 관람인데 더 좋았다며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Stage door라고 쓰여 있는 곳에 서서 비앙카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다 나갈 때쯤 뒷문이 열리고 배우들과 밴드 연주자들이 한 명씩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사이로 드디어 비앙카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비앙카!’하고 소리쳤고, 그녀가 나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사진을 같이 찍어 줄 수 있겠냐고 묻자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곁에 섰다. 함께 서있던 멕시코 아주머니께서 사진을 찍어주셨다. 그 후에는 그녀가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보다가 사인을 부탁했다.
-유튜브에서 공연 영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봤어요! 정말 멋있어요. 비앙카.
-Oh, Thank you so much, Sweetie.
돌아가는 우산 속에서 갑자기 마음이 간질간질거렸다. 그래서 으아!!!!! 소리를 내면서 발을 동동 구르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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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3일 작성
2020년 9월 9일 편집 및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