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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타임조아나 Sep 10. 2020

'신선한 스토리'가
파라다이스를 만나면

뮤지컬 <위키드> 리뷰




췅히 뤼!




로터리 티켓에 당첨된 관객에게 주어지는 배지 기념품

  모두가 숨죽였다. 짧은 침묵의 순간. 마지막 호명자를 부른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될 것 같아. 되지 않을까? 그래서 마지막 호명자가 나오고 스태프가 종이를 확인하는데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스태프는 마지막 호명자의 종이를 반으로 접은 뒤 새로운 종이를 하나 뽑았다. 그리고 불린 이름이 바로 ‘췅히 뤼’ 였던 것이다. 표를 받으러 나갈 때 하는 감탄사까지 연습해두었건만 정작 이름이 불리자 당황스러웠다. 수많은 상상의 리액션을 뒤로하고 나는 그저 오 마이 갓! 을 외치며 앞으로 나갔다. 



 






위 사진은 뮤지컬 <북 오브 몰몬>의 로터리 티켓 추첨현장이다. 이름을 적어낸 관객들 중 뽑힌 소수에게 싼 값에 오케스트라 앞좌석을 파는 이벤트다.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지불할 현금이 있는지 확인했다. 스태프가 작은 배지를 주면서 ‘자 이건 네 거야’라고 말했다. 초록색 바탕에 ‘I won wicked lottery!’라고 쓰인 배지였다. 티켓 창구에서 여권을 보여주고 드디어 티켓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무대가 너무 가까워 별로였다고 하는데 나는 배우들의 모습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어 기대가 되었다. 문득 내 좌석은 어디일까 궁금해졌다. 티켓 창구의 아저씨는 좌석 지도에서 내가 앉을자리를 가르쳐주었다. 무대 바로 앞에 있는 첫 번째 좌석의 오른쪽이었다. 아주 중앙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장자리도 아닌, 무난한 위치였다. 방금 티켓을 받아간 여자애가 좌석까지 확인하러 온 것이 웃겼는지 아저씨는 좋은 하루 되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호들갑을 떨며 밖으로 나갔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을 사로잡은 건 무대 위에 달려있는 커다란 용이었다. 한국 공연에 비해 공연장이 커서 용 하나 만으로 꽉 차진 않았지만 막이 오르기 전 두근거림은 그대로였다.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 박스에서 연주자들이 공연을 위해 음을 조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는 생각보다 협소했다. 그물망 아래로 연주자들이 악기를 다듬고 음을 맞추었다. 한참 구경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하이!’하고 인사했다. 저 밑에서 첼로를 만지던 첼로스트가 인사를 걸어온 것이다! 나도 반갑게 ‘하이!’라고 인사했다. ‘오늘 연주 파이팅하세요!’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지만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몰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작은 소품의 디테일이 나를 울게 해 

  좌석이 무대 바로 앞이었기 때문에 손을 조금만 뻗으면 바로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공연 도중에 엘파바가 메고 있던 가방이 내가 좌석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그 가방을 한번 만져 보고 싶었다.  연기가 끝난 후, 엘파바가 노래를 부르며 그 가방을 다시 가져갔다. 공연하는 내내 배우들이 코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경험은 분명 신선했다. 배우들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마주하고 다리에 들어가는 힘과 몰래몰래 이마를 긁는 손가락을 볼 수 있었고 저 멀리 서는 들리지 않을 자기들만의 애드리브도 다 들을 수 있었다


  대극장 연기를 보면 가끔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이는 멀리 있는 관객에게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연기를 코앞에서 보니 그 '과장'은 배가 되었다. 계획된 침묵이 아닌 이상 배우들은 단 한시도 쉬지 않았고 끊임없이 표현했다. 눈으로도 말하고 손짓으로도 말하고 어깨로도 말했다. 다만 가까이 있기 때문에 문득 ‘이건 계획된 공연이야’라고 느낀 순간이 종종 찾아왔다. 배우들의 분장이 고스란히 눈에 보인다거나 (염소 그레 먼디 교수의 실리콘 가면의 경계선이나 배우들의 등 뒤로 연결된 살색 무선 마이크라던지 원숭이들의 가면 등) 노래를 하다가 침이 튀기는 것 까지 보였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나는 엘파바의 초록색 피부가 전부 피부에 물감을 칠해놓은 것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얼굴을 제외한 손과 팔에 얇은 초록색 실리콘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정 중앙에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대가 한쪽으로 치우쳐져 한쪽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조작하거나 소품을 옮기는 스태프를 보는가 하면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배우들도 볼 수 있었다.




신선한 스토리가 무대 위의 파라다이스를 만나면

신선한 스토리'가 


무대 위 '파라다이스'를 만나

출처 중앙일보 NEWSis



  한국에서 처음 위키드를 봤을 때는 <위키드>라는 뮤지컬 자체에 관심이 생기던 때였다. 그리고 위키드 브로드웨이팀이 내한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한국어로 초연되었기 때문에 내한을 가지 못한 슬픔을 한국어 버전으로라도 풀어보고자 표를 예매했다. 그래서 배우들의 연기나 노래 혹은 공연 자체에 대한 감동보다는 <위키드>라는 뮤지컬을 알게 된 감동이 더 컸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거지? 더욱 놀라웠던 건 이토록 기발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무대 위 파라다이스로 옮겨낼 수 있었을까,였다.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서쪽 마녀가 사실은 악녀가 아니라 그저 다른 색의 피부를 가진 천재 마법사였고 그녀와 대립하던 금발의 하얀 마녀는 원래 푼수 끼가 가득하고 꾸미기를 좋아했던 귀여운 마법사라는 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큰 틀이다. 어떻게 해서 사람들에게 서쪽 마녀 엘파바가 나쁜 마녀이고 오즈를 관장하는 하얀 마녀 글린다가 착한 마녀가 되었는지 뒷이야기를 새롭게 쓴 것이다. (게다가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 이것이 중요하다. 유머! 유머! 재미있게!

  이 뮤지컬은 순환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하얀 마녀 글린다가 비눗방울을 타고 내려와 서쪽 마녀는 죽었다고 관중에게 알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와 서쪽 마녀가 친구였냐는 한 시민의 질문에 글린다가 과거를 회상하며 극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막이 내린 후,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글린다가 등장하며 다시 첫 장면이 시작된다. 두 마법사의 우정과 헤어짐을 알고 나자 엘파바의 책을 껴안고 비눗방울에 오르는 글린다의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출처 NEWSis
    한국어 초연 배우 차지연 (엘파바 역, 왼) 정선아 (글린다역, 오) 출처 플레이디비


  


  한국에서 작품 자체에 감동을 받았다면 이번에는 배우들의 연기에 감동을 받았다. 엘파바를 맡은 배우는 무엇보다 노래를 잘했다. 저게 과연 사람의 소리인가, 싶을 정도였다. 호흡도 길었고 성량도 대단했다. 마치 목에서 녹음된 노래를 뽑아내는 것 같았다.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은 역시 엘파바가 defying gravity를 부르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이었는데 저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날아오르며 사방에서 비춘 조명들이 넋을 놓게 만들었다. 


  가장 감명을 받았던 배우는 글린다를 맡았던 금발의 배우였다. 한국과 미국을 통틀어 가장 참신한 글린다가 아니었을까. 특히 엘파바와 친해지기 위해 메이크오버를 도와주는 "popular" 장면은 압권이었다. 개방정과 애드리브가 다채로움의 끝을 보여주었다. 영상을 통해 여러 배우가 연기하는 글린다를 보았고 한국에서 가장 기대했던 배우인 정선아의 글린다도 봤지만 대부분 비슷한 구간에서 비슷한 애드리브를 쳤다. 그리고 관객이었던 나도 어느샌가 ‘글린다라면 이런 애드리브를 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글린다는 독창적이었다. 생각지 못한 장면에서 애드리브를 치는가 하면 보편적인 글린다식 애드리브를 독특하게 쳐내기도 했다. 가장 귀여웠던 장면은 (하나로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지만) 피에로와 자기가 결혼할 거라고 말한 후,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 넘어지는 장면과 엘파바의 낡은 원피스를 파티 드레스로 바꾸는 장면이었다. 다른 글린다들은 모두 엘파바를 보고 주문을 걸고 옷이 바뀌어지지 않자 지팡이에 대고 화풀이를 했던 반면 이 글린다는 처음부터 보지 않고 주문을 걸면서 당연히 엘파바가 입고 있는 옷이 파티 드레스 일거라고 생각하고 뒤를 돌아본다. 하지만 옷은 바뀌지 않았고 글린다는 이를 보며 깜짝 놀란다. 이 popular 씬 자체가 캐릭터의 특징과 맡은 배우의 매력을 동시에 들어낼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날 글린다를 맡았던 배우는 그 몫을 톡톡히 해냈다



  목표가 하나 생겼다면 대본을 꼼꼼히 공부해서 있는 뮤지컬 위키드를 다시 한번 보는 것이다. 한국에서 위키드를 보고 아쉬웠던 점은 ‘번역체의 어색함’이었다. 특히 노래 안의 ‘No good deed’ , ‘For Good’ , ‘Defying gravity’는 대사 자체가 그대로 다가오지 않았다. 넘버 ‘For good’에서 ‘because I knew you’라는 대사가 ‘너로 인하여’로 번역된 것을 듣고 깜짝 놀라 흐르던 눈물을 닦고 말았다. 그래서 틈틈이 뮤지컬 넘버들을 원어로 듣고 해석도 해보았지만 알아듣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무대에 집중하랴, 대사 떠올리랴, 배우들의 애드리브를 관찰하랴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영어로 된 대본도 구하고 프로그램북에 대본들과 넘버 가사들이 실려 있으니 (그래서 겁나 비쌌다는 건 함정) 다시 한번 제대로 있는 그대로의 위키드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적어도 남들이 웃을 때 왜 웃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니까.   







2014년 5월 28일 작성

2020년 9월 10일 편집 및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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