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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Aug 02. 2021

여름 아침을 걷다

에어컨 없이는 하루 종일  맨정신을  지키기 힘든 7말8초. 그래도 내겐  이른 아침이 있다. 지하철 첫 차 시간 무렵 집을 나선다.


심심한 동네 할머니답게 양재천, 벛나무 터널길을 느릿느릿 걷는다. 30분이면  '시크릿 가든'이다. 은밀할 거라곤 하나도 없지만 양재천 나그네들에겐 특급 쉼터로 입소문이 자자한 꽃밭.

  

작은 경로당을 끼고 있는 터에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꽃모종을 심고 가꾸며 열일을 하는  정원이 됐다. 능소화는 지고 있다. 비슷한 주홍 계열  나리꽃이 그 자리를 대신한 모양. 이 시기 꽃밭의 지존은 청보라빛 수국이다. 그 신비로운 색감에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금계국이랑 쑥부쟁이의 수수한 미모에도 호감이 간다.


되돌아 가는 길, 단골 운동기구 코너에 있는 스텝 사이클을 타본다. 손잡이를 잡고 페달 위에서 달리기하듯 팔다리를 움직이라는 안내문이다. 일분도 안돼 허벅지가 뻐근하다. 최소 5분을 채우기는 커녕, 얼른 스테퍼를 내려온다.


아직 문을 연 베이커리나 카페가 없다. 편의점 앞, 새 둥지 헤어에 등을 벅벅  긁고 있는 모닝 컵라면족 사이에 끼어 앉아 1,200원 짜리, 뜨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다.


우리 앞에 커다란 탑차가 멎더니 반바지 차림에 땀투성이 배달의 기수들이  등장한다. 카트에 생수병, 캔맥주,음료 박스들을 가득 싣는다. 세상의 모든 물건들을 실어 나를 기세로.


그들의 어깨와 허리 근육이 무사하길 맘속으로 기도한다. 그들이 지키고 싶은 사랑하는 이들과 오래 행복할 수 있도록!


아파트 단지 옆 배롱나무 꽃잎들을 한참 우러러본다. 불타는 여름 풍경에 없으면 서운할 그 어여쁨에 감동하면서.


온전한 여름 아침 한 시간은 젊고 빛났을 때 누려보지 못한 호사다. 찬란하고 가혹했던 젊음의 날들이 끝난 뒤 이렇게나 느긋한 팔자가 되다니. 더이상 젊지 않은 덕분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말없이 매미 합창단의 공연에 귀기울일 수도 있다.


어느 시인이 말했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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