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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Aug 17. 2021

딸의 정글 텃밭

30대 후반 회사원인 딸은 우리 동네 그린벨트 지역에 6평짜리 임대 텃밭을 갖고 있다. 매년 임대료를 지주인 광평대군 종중단체에 지불하며 임대 계약을 갱신한다. 광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정비인 소헌왕후 소생의 5째 아드님으로 요절했다 한다. 그의 묘역 일대는 그린벨트로 묶여있고 후손들이 관리 책임을 맡았다나.

   

분양된 여러 임대 텃밭 중에서 딸의 텃밭은 눈에 확 띈다. 텃밭이 난데없는 정글이기 때문이다. 내세운 슬로건은 자연친화적 태평농법! 쉽게 말하면 게으른 자유방임 농사 스타일이다. 결과는 잡초 덤불 속에서 악전고투 중인 토마토와 고추, 오이와 가지를 애처롭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


나름 ‘그린 핑거’인 딸에 의하면 단일 작목 재배는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며 이것저것 섞어 심기가 순리란다. 그럴싸하다. 하지만 주위에 포진한 프로 텃밭 농민들은 잡초 투성이 이웃 텃밭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딸에게 짬뽕과 막걸리를 권하며 한수 가르쳐 주려 애를 쓰셨단다. “풀을 뽑아라.” “배추 모종 심을 때 약을 꼭 쳐라.” “비료를 제때 뿌려라.”


웃는 얼굴로 성실한 선배들의 조언을 듣지만 받아들이지는 않는 태도에 지치셨나. 서너 해가 지나자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잔소리 폭탄을 투척하지 않는단다. 이 건방진 후배 농민의 스타일은 어느덧 존중받기에 이르렀다는 자평.


요즘 딸의 텃밭에 무성한 들깻잎순을 따와 데친 후 깻잎순볶음을 만들면 김밥 속 재료로 안성맞춤이다. 입맛 없는 아침, 우엉조림이랑 어묵볶음을 함께 넣어 채식 지향적 김밥을 말아 먹는다. 역시 딸의 텃밭 출신인 방울토마토랑 노각, 또는 고추를 담으면 깻잎순볶음이랑 텃밭 3종세트가 구성된다. 이건 엘리베이터 옆 라인 친구에게 선물하기에 딱이다.


 내 남편이 사는 대구 집에 딸린 작은 텃밭엔 95세 친정엄마랑 내가 매달려 낑낑대지만 도무지 성적이 시원치 않다. 딸은 다르다. 해마다 텃밭 작물 배치도를 그리고 실행한다. 계란껍질, 커피 찌꺼기 등 온갖 부엌 부산물을 비료로 쓴다. 배추와 양배추에 숨어든 벌레를 핀셋으로 잡아내며 텃밭 실험을 해가는 스타일. 텃밭모녀 3대 중 가장 출중한 농민이다. 친정엄마는 외손녀를 영농후계자로 치켜세운다.


 11월에 딸은 작은 아파트를 세내어 독립할 계획이다. 임대 텃밭으로부터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의 아파트를 용케 구했다고 자랑이다. 퇴근 길 텃밭에 들르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 어두워질 때까지 혼자 흙을 주무르며 하루 치 직장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는 딸. 6평짜리 텃밭은 어느새 자기 치유 공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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