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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Dec 26. 2021

휘리릭 레시피로 차린 점심

오늘 친구 셋이 우리 집에 왔다. 상황은 호락호락하지않다. '위드 코로나'선포  한달 반 만에 다시 방역 고삐를 바짝 죄게 됐다는 거, 안다. 하지만  모두 3차 접종 완료자들이다. 또 바깥보다 집이 안전할 터. 최근  독거노인 대열에 합류한 내 집이 최적이다.


 메뉴는 부추전이랑 미나리 넣은 도토리묵무침에 무알콜 맥주. 행여 모자랄까 싶어 두부 부침을 추가한다. 한 친구가 홈메이드 고등어조림을 가져왔다. 배추된장국을 차려내니 후다닥 세팅 완료!


 뭐든 대충 뚝딱해내는 스피드 요리는 내 특기다. 일명 휘리릭 레시피랄까. 과잉 대접과 과소 상차림 사이, 부담스럽지 않은 메뉴 선정이 친구들을 불러대기에 적당하다.


 다른 친구들이 가져온 케익과 딸기까지 합세한다.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팟럭 파티! 다들 좋아 죽는다. 더 맛있는 건 수다 한 판. 무릎 관절염 수술 날짜를 받아놓은 친구, 난생 처음인 수술이 무서워 밤잠을 못 이룬다고 하소연한다.


 몇 달 전 발목 수술을 받은 수술 선배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토닥인다. 봇물 터지듯 목 디스크와 갑상선염, 팔목 터널증후군에 족저근막염까지 저마다 고통을 호소한다. 순식간에 종합병동이 돼버린 상황. 서로 쳐다보며 와하하! 웃음보가 터진다.


 이번엔 삼식이 남편을 날마다 먹여 살리는 활약상이 펼쳐진다. 오늘 끓인 국을 내일 절대 먹지 않는 남편을 둔 친구, 아들을 왕자로 키운 시어머니가 원망스럽다며 한숨이다. 남편이 옛 직장 동료와 점심 먹으러 따로 나가는 날엔 기쁨을 숨기며 표정 관리를 한다는 말에 박장대소. 남편을 조금 닮은 아들이 미래 며느리에게 반품당하지 않을 방안을 쥐어짜느라 머리를 맞댄다.


 다른 친구는 ‘코로나19’로 어린이집이 문을 자주 닫는 바람에 종일 근무 손주 돌보미가 됐다. 팬데믹 난리통에 할머니 보육 서비스의 위력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녀. 문제는 아들과 며느리가 청소와 빨래, 요리까지 내맡기는 통에 생긴 울화병이다. 잔뜩 어질러 놓고 출근해 버린 아들 며느리 때문에 혈압은 오르락내리락하고 짜증은 불쑥 불쑥 치밀어 오른단다. 귀여운 손주를 돌보는 보람이 아들·며느리의 괘씸한 행동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한다는 실토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과 아들을 둔 나로서는 잘 모르는 세계. 주제넘은 조언보다는 묵묵히 듣는 쪽을 택한다.


 너나없이 직장 다니느라 동동거리며 아이들을 길렀던 우리들이다. 그 고난의 행군을 끝내자마자 손주 양육자로 또 한 번 뛰어야 하는 게 할머니의 운명일까. 문제는 갈수록 떨어지는 체력. 황혼 육아 중인 친구들에겐 무릎과 허리를 파스로 도배하는 날이 늘어난다. 시도 때도 없는 두통에 시달리기도 한다. 종일 손주를 돌보는 일로 발생한 고립감도 강적이란다. 혼자만 탈진해가고 있다는 서글픔에 울었다는 친구도 있다. 스트레스로 폭식 습관이 생겨 고민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털어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겐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스스로 입장 정리가 될 때가 있다. 듣는 이가 던진 한 마디에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도 한다. 폭풍 수다 점심이 끝날 무렵, 한바탕 살풀이굿이라도 한 듯 얼굴들이 환해진다. 몸 속 호르몬 체계가 활성화되는 느낌마저 든다. 누군가 말한다. “친구들아, 나 혼자만 늙어가는 게 아니라서 안심된다. 너희들이 있어서 정말 든든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65세를 넘어 노년으로 진입한 이상, 완전히 건강한 몸 같은 건 없다. 오장육부나 근·골격계 어딘가 한 군데 이상 삐걱거리고 아프다. 인공 안구, 인공 이빨, 인공 관절, 인공 심장 박동기와 함께 약봉지를 끼고 살아야 하는 날들이 길게 이어질 지도 모른다. 마음도 긁히고 멍든 상처투성이다. 어떻게 살지?


 정답은 모른다. 그냥 불완전한 채로 재밌게 살면 될 것 같다. 건강하지 못한 채로 웃을 수 있으면 된다. 속마음을 나눌 진짜 친구 세 명만 있으면 가능할 것 같다. 서로 비슷하게 나이 먹어 가는 일만큼 우리를 뭉치게 하는 게 또 있을까. 나의 행복한 노년을 위해 친구들의 행복이 중요해진 오늘. 우리들의 생애 중 그 어느 때보다 더 찐한 우정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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