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내가 현재 사학과를 다니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왜곡하지 않고 바른 역사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 적어도 역사가 흥미롭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 이를 실행하기 가장 좋은 직업은 작가였다.
작가는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내가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것들을 실제화시키기 좋은 도구였다. 주인공이 달리는 이유, 달리는 모습, 향기가 나는 이유, 어떤 향이 어떻게 나는 지 등. 단순한 걸 거창하게 때론 거창한 걸 단순하게 만들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다 사극 덕분이었고, 내가 왜곡 논란이 없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한 것도 사극이었다. 사학과를 온 이유도 보다 많은 영감을 얻고 소스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지원한 것이다.
내 꿈은 꽤 거창했고, 무리수였지만 수시 때 서울예대, 한국예술종합대학의 문창과에 지원하기도 했다. (한예종은 극작과 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내가 지금 사학과에 다니고 있다는 것은 떨어졌다는 의미겠지만, 나는 지원한 것만으로도 스스로 좋은 도전이었다고 자부해왔다. 담임 선생님의 눈초리를 받으며 이후 사학과를 썼지만 크게 후회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내겐 작가라는 꿈이 유독 빛이 났다. 현재 내가 쓰는 내용들이 그때의 신념과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내 꿈은 그렇게 시작했고, 매일 당당했다. 처음 시집 겸 에세이집을 내고, 공저에 참여하며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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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공무원을 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평범한 대학, 볼 것 없는 스펙은 하루하루 나를 작가에서 멀어지게 했다. 처음에는 내가 더 굳게 다짐하고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라는 막연한 각오로 임했다. 그러나 각오는 막연했고, 현실은 차가웠다. 20여 년간 안정적인 직업이 있기를 바란 이성적인 내가 날이 갈수록 더 강하게 자라왔다. 일정 수입이 있는 직업이 있기를 바라면서도 그런 일을 뒤로는 부정하는 내가 참 싫었다.
철이 없는 건지, 철이 들어버린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빠졌다. 막연한 현실주의였다. 내가 어정쩡한 성인이 되고 알아버린 세상은 꿈을 꾼 나를 비참하게 했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이 “작가가 본업은 아니지?”이었다. 나조차도 내게 그런 말을 반복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계산적으로 살라고. 눈을 감아야 보이는 눈부신 꿈, 그런 건 개나 줘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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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영화관 알바를 했던 경험을 토대로, 영화관 취업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 마치 이제는 꿈만 좇는 어리숙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 싶었는지, 혹은 나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한 것인지.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정말 철든 인간 같았고, 그냥 툭 내뱉은 말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조차 내겐 좋은 방패 같은 것이었다. 하면 할수록 어둔 터널 같던 작가라는 꿈보다 밝은 잔디밭을 걷는 기분이었다.
괜히 안심이 되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이었다. 엄마는 내가 하염없이 작가를 바란다고 생각해서 내심 걱정했는데, 계획이 있었다니 다행이라고까지 말했다. 그 말에 소심한 나는 당찬 포부보다 현실적인 짹짹거림을 지저귀었다.
미래에 대해 누구든 소심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나조차도 마음 편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심이 중에 악성 소심이가 아닐까. 그렇게 꿈꾸고 외치고 다시 꿈꾸던 길도, 변명처럼 뿌려놓은 길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았건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현실적인 척이었다.
아직도 그 꿈을 놓지 못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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