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를 하면서 주로 즉석 밥을 사먹곤 한다. 간단하게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을 수 있고 김치만 있다면 고슬고슬한 밥을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취생에겐 꽤 유용한 식품이 아닐 수 없다. 하루는 계획했던 것보다 돈을 많이 써서 즉석 밥을 먹으려는데 한 개도 없어서 몹시 당혹스러웠다. 분명 기억하기론 적어도 한 개는 남아있어야 계산이 맞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즉석 밥을 싸고 있던 빈 껍질만 남아있었다. 오늘 저녁은 굶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남아 있어야 할 즉석 밥이 머릿속을 괜히 맴돌았다. 부족함에서 오는 결핍과 배고픔이 주는 나름의 예민함 때문이었을까. 근래에 들어 이런 감정이 상실감이겠다고 자주 느껴왔다.
현재의 결핍과 예민함은 미래의 상실감을 예견하지 못하는 미숙한 내가 판단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꼭 화장실 거울처럼 숨김없는 내 모습이 투명하게 비친다. 어수룩한 내가 보내는 어수룩한 미소, 긁적임. 그 어떤 가면도 화장기도 없는 오롯한 내 모습을. 상실은 좌절을, 때론 깨달음을 준다곤 하는데 내겐 꼭 깨달음을 좌절에 싸서 머리에 내리꽂는 식으로 다가온다. 이러니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같잖은 변명에 나를 좀 숨겨본다면, 돌멩이로 머리를 맞았는데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상실조차 간신히 받아들이고 있는 와중에 정신까지 차리라니. 그럼에도 좌절 속에는 있지 않겠냐고, 누군간 좌절을 벗겨내 성장해 가는데 너는 그럴 생각이 없냐고 대뜸 다른 돌멩이를 던져댄다. 상실은 이런 상황에서도 수도 없이, 깨어나라고 소리친다. 맞아서 넘어졌는데 괜찮냐고 묻기는커녕 정신 차리라고 면박을 준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은 부족하고, 부족한 미랜 상상하고 싶지 않아서 지금보단 과거를 탓하는 게 편해서. 어떤 미래에 또 같은 것을 탓하고 있다면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먼 앞을 봐야 할 내 눈이 굽은 목 때문에 기껏 신발 앞코나 보고 있으니 한심하다고도 하겠지.청춘이 이렇게 건조하고 텁텁해서 쓰겠냐고 하겠다만, 이게 내 청춘이고 시간이고 그 속의 나인걸 나만 알아도 된다는 사실이, 문득 긍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빈 공간이 너무 커서라는 걸. 그곳엔 욕심보단 현실이, 꿈보단 길이 그런 오늘이 차오른다.결국 즉석 밥을 보고 깨달았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 상실 속 깨달음이 이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