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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상품 Oct 16. 2020

당신이 부르는 이름에 - 1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노란선 안으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노란선. 어릴 적에는 스피커에서 말하는 노란선이 당최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내 눈 앞에 있는 이것이 스피커에서 말하는 노란선인 것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선이라고 하기에 ‘노란선’은 정사각형의 노란 판들이 줄지어 붙어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선이라 함은 딱 봐도 정말 선, 면이 아닌 선이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할까. 그냥 선이라면 선이고, 그걸 면이라 하면 그저 면이 되는 것이다. 초록불도 파란불이 되어있는데 그깟 판이 줄지어 붙어있는 것을 직사각형이라 하면 어떻고, 선이라 하면 또 어떻겠나. 

  그저 그 선이 나를 붙잡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저 아저씨처럼 선 위에 서 있든, 선 안으로 완전히 물러나 저기 의자에 앉아 있든, 먼지가 가득한 벽에 기대어 서 있든. 내 시선이 온 힘을 다해 선 밖으로, 선로로 향해도 발이 노란 선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겠다.

 서울행 열차가 열차 냄새를 풍기며 천천히 역으로 들어왔고, 건너편에선 기차가 서지 않고 빠르게 역을 통과했다.


 내가 저기 있었어야 했는데.


 도착하는 열차의 선로로 뛰어 내려가 봤자 물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곳의 직원들과 경찰들이 조금은 귀찮아하거나 어처구니없어하긴 할 것이다. 아마 음주측정을 할지도 모른다. 기차가 서는데 뛰어내리는 사람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받아들이기 쉽고, 자연스럽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여전히 빠르게 지나가버린 기차가 아쉬울 뿐이었다.


 저 속도면 아프진 않겠네.


 꼭 기회를 놓친 기분. 그 순간만큼은 기관사에 대한 미안함, 그가 겪을 트라우마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언제까지 미안해하고 언제까지 감사해하고 살 것인가. 헤픈 미안함, 감사함. 지겨웠다. 생각하고 배려하고 이해하고.


 언제까지.     

 언제까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언제까지를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러면서도 나는 도착한 이 기차를 타야만 했다. 결국은 순종하고 따르고 버티는 것이 의무이자 습관이 되었으니 말이다. 짐이고 빚이고 다 벗어던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열차를 떠나보낸 시선을 챙겨 넣었다.    


 10D. 급하게 예매했는데도 다행히 순방향 좌석이 남아있었다. 간혹 열차에서 멀미를 하곤 하는데 역방향은 그 ‘간혹’에 매번 걸려들곤 했다. 한 시간 동안 눈이라도 붙이려면 어떻게든 순방향 좌석을 잡아야 했다. 어쩌면 평일 대낮이라는 시간대가 자리를 만들어준 것일 수 있다. 주말도 아니고 평일 이 시간대에 지역을 넘나드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하아.


 습관이 돼버린 옅은 한숨을 고치려 애를 먹었는데, 어쩌면 올해는 고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창가라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쟤 형태를 보이기도 전에 사라지는 것이 위안이 된 달까. 한 달 전 끊은 담배를 역에 도착하자마자 사버린 것도 죄책감으로 남길 필요는 없겠다 싶을 만큼.

 역을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이 열차가 멈춰버리면 어떨까 했다. 내가 여기서 괴성을 지르거나 혹은 갑자기 창을 깨려 한다면 이 열차를 멈출 수 있을까.


 아니.


 그래, 그딴 것으로 이 열차를 멈출 순 없을 것이다. 열차 승무원들만 곤욕스럽게 할 뿐.      

 지나친 상상에 나는 이미 이 창을 깨고 열차의 지붕에 매달려 기어코 앞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내가 열차의 머리로 향하는 것을 알아챈 승무원은 나를 잡으러 지붕으로 올라왔고 기관사는 서서히 열차의 속도를 줄였다. 

 이렇게만 되면 오늘만큼은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하나로 나는 대체 몇 개의 법을 어겼는가. 간신히 뒤쫓아 오는 승무원을 발로 걷어차 열차에서 떨어뜨리고도, 열차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나의 패악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제정신이냐 소리치겠다만 나는 열차를 타기 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역에서 이미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


 건너편에서 빠르게 역을 통과하는 그 열차와 함께 한 번은 사라졌던 것이 아닐까. 몸이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지는데, 마음이 사라진다면 몸이 남았다 한들 그게 사라지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티를 내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기차를 타고 창밖을 보며 움직이는데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결국 나만이 스스로 이상하다 생각할 뿐이다.


 [이번 역은 우리 열차의 마지막 역인 서울역입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무겁게 눌러앉은 눈꺼풀을 깊게 찡그리고 뜨자, 열차는 속도를 줄이고 점점 멈추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눈 속 깊은 곳에서부터 목의 뻐근함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지그시 눈꺼풀을 눌러 눈동자를 어루만졌다. 

 몇 안 되는 승객들은 짐을 챙겨 내릴 준비를 하는데 나는 통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하지만 더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와 딱히 챙길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부산 떨 것도 없이 일어서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도착했니?

 응. 

 그래, 얼른 집으로 와.


 집으로 가는 길이 이토록 순조로운 것이었나. 집이라는 것은 언제나 짐이었다. 흔하게 갖는 여유, 집이 주는 안정, 가정이라는 울타리. 하지만 그런 걸 떠나서 내겐 그 모든 것이 단지 생존에 불과했다. 자고 먹고 입고, 그리고 살아가는 것. 나는 그 집을 지키려 부단히 애를 썼다. 누군가는 안타까워했고, 누군가는 눈물을 보였으며, 또 누군가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이 사치라고 느껴질 만큼 나는 절박했다.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민법, 가정법을 찾아보고, 여기 구청 저기 구청을 뛰어다녔다. 변호사 사무실은 또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뒤꿈치가 아리다.


 사회라는 곳에 갓 입성한 것치곤 액땜이 꽤 거창했다고들 말한다. 가끔은 내가 진짜로 겪고 있는 일인가 싶을 만큼 현실성이 떨어지다가도, 내가 마음 편히 누울 수 있는 공간에서 쫓겨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그 한 주를 갉아먹었다. 돌아본다는 것도 사치스러운 매일, 매주가 지나고 지겨운 싸움은 끝내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었다. 수차례 묶었다 풀었다 반복한 매듭은 헐거운 실뭉치에 불과했다. 나는 가장 마지막의 마지막인 그 집이 또 다른 대출을 끼더라도 지켰다는 것에 만족했다. 집마저 날리면 너무도 억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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