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차 제자를 만났다.
일상을 공유하며 자주 만나는 경우와는 다르게, 어쩌다 만나게 될 때에는 늘 세월의 흐름을 돌아보게 된다.
이런 만남의 경우 정지한 듯 박제된 예전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세월의 거센 흐름으로도 살아남은 한결같은 삶의 소중한 본질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8년 전 꿈 많고 설렘이 가득한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순수함으로 나의 젊음날의 열정을 마주했던 그 제자는 만남 이후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쌤 오랜만에 봤는데 좋은 말씀 넘넘 감사해요 8년 전부터 신세만 지고 있는 것 같네요. ㅎㅎ 덕분에 예전에 여백 없이 살던 제 모습도 떠오르고 고교시절 열정을 불태우던 선생님도 생각나고 그래요. 담번에는 아마 진짜 의사가 되고 뵙게 될 것 같은데 그때까지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 나가길..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의 답변
"신세 지는 느낌이었다면 내가 너에게 뭔가 해주었다는 의미인 것일 테니 난 기분 좋아하면 되는 거 맞지?ㅋ
세월이 지나도 그 세월이 넘어설 수 없는 변하지 않는 본질 같은 소중한 것이 있더구나. 오늘 난 널 만나서 그걸 마주한 것 같다. 예전 고등학교 시절처럼 너의 옆에서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상황은 아니지만 변함없는 너에 대한 나의 간절한 응원의 마음이 닿길 바란다. 진짜 의사가 되면 만날 것 같다는 말에 가슴이 웅장해지는구나.
너의 모습 그대로 넌 이미 훌륭한 의사란다. 너답게 한결같은 모습의 의사이길... 한순간의 행복도 놓치지 않고 지내길...
나중에 웅장해진 마음으로 또 보자^^"
그리고 학생의 답변
"물론이죠 얼마나 많이 주셨는데요~ㅋㅋ
선생님도 저한테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런 분이에요. 선생님, 자주 찾아뵙지는 못해도 항상 한켠에 감사와 사랑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신 것 같아 무한한 감사를 다시 한번 느껴요^^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그때까지 잘 지내셔요!"
일상이 아닌 추억으로 결속된 만남이 오히려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을 선물했다.
모든 학생들이 나와의 만남을 거쳐 간 후 자신의 살아가는 모습을 애써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교사들은 아이들의 행복한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있기를 기대하며, 교사의 영향력이 구체화되든, 그걸 아이들이 인식하게 되든 그 여부에 관계없이 제자들이 정말 잘 지내고 있기를 한결같이 믿으면서 응원한다.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가는 그 순간까지... 기억이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늘 그런 마음이다.
그런데 이렇게 연락이 되거나 만남이 있을 경우 교사는 덤으로 축복감을 누린다.
박제된 듯, 늘 내게 생생하게 남아 있던 그 학생에 대한 기억의 단편 하나...
고1 때 만났던 그 학생이 고3 때 나를 일부러 찾아왔을 때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냐고 물으니... 그 학생의 대답이 그 때나 지금이나 이보다 더 큰 울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 감동시켰다.
“그냥 그 자리에 계속 계셔주세요.”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인내와 기다림은 교사의 몫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 말을 학생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존재에 대한 고마움과 존중만큼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말은 없다. 우리는 늘 우리가 행동한 것만큼, 자격을 갖춘 것만큼만 되돌려 받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면 자신감도 당당함도 갖출 수 없다. 애쓰지 않았는데도 그대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느낌은 상대에게 기대하는 것 이상의 감동과 성장을 일으킨다.
추억이라는 흔적뿐이어도 그 순간의 만남과 매 순간의 진심으로 이미 교사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해 한다. 그런데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만남에서 난 복에 겨운 그 이상의 행복을 선물받았다.
그 제자는 8년 동안 자신이 신세를 졌다고 했지만, 그 기간 동안 내가 받은 축복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