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 집 세탁기 쓴 지 얼마나 됐지?"
하안이 뒷좌석에 몸을 기대어 조수석에 있는 엄마에게 넌지시 물었다.
"글쎄...? 이 집 이사 올 때 산 거니까 한 7~8년은 됐지 아마?"
"7~8년? 10년은 된 거 같은데?"
"얘는 무슨 소리 하고 있어 그거 반밖에 안 썼다. 우리 이 집 들어올 때 산거잖아"
엄마는 큰일 날 소리라도 한다는 듯 하안에게 말했다.
“중고로 산거였잖아.”
“중고가 아니라 A급 리퍼였어. 한 번도 안 쓰고 바로 반품된 제품.”
“아니 근데 7년밖에 안 됐는데 고장이 난단 말이야?”
“고장이라니? 멀쩡하구먼?”
옆에서 운전하던 아버지도 한마디 거든다.
“아니 저번에 한번 고장 나서 밑에 벨트인가 모터인가 수리했었잖아. 거의 수명도 다됐다고 그러더니만”
"세탁기 수명이 다 된 게 아니라 벨트가 교체할 시기가 돼서 그랬대. 그 정도 쓰면 다 그렇대"
옆에 앉아있던 남동생 하준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며 대꾸했다. 분명 양쪽 귀에 에어팟을 끼고 앉아있는 주제에 어떻게 얘기를 주워듣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 아무튼 우리 집도 세탁기 바꾸면 안 돼? 요즘 세탁기 좋은 것도 많이 나오는데 건조기까지 같이 주는 것도 있고요.”
“맞아, 엄마 친구도 그렇게 샀다더라”
“나 진짜 탈수 돌아갈 때는 내 방에 못 있겠어 얼마나 시끄러운 줄 알아? 그리고 건조기 없이 그냥 말리니까 검은색 옷에 먼지도 엄청 묻어. 엄마 내 친구 영식이 알지? 걔가 그러는데 진짜 자기도 건조기 안 쓸 땐 이런 거 왜 쓰나 했는데 써보니까 신세계래.”
왠지 엄마가 자신의 말에 조금 흥미를 보인다 싶자, 하안은 자못 격양된 표정과 목소리로 토로했다.
“푸르지오 사는 그 성민초 영식이?, 걔랑 아직도 연락하니? 아무튼 엄마는 찬성이다 얘”
나이스, 거의 다 넘어왔다 싶어서 하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빠도"
"저도요"
가족들이 이때다 싶어서 다들 동의한다.
"근데 하안이 네 돈으로 사는 거지?"
갑자기 엄마가 묻는다.
"하안이가 사겠지. 우리 딸 승진하더니 요즘 돈 많은가 봐?"
아빠도 엄마 말에 이때다 싶어 거든다.
짜증이 났다. 항상 이런 식이다. 하안이 뭔가 추진을 할 때마다 다들 돈 얘기를 들먹인다. 그놈의 돈 앞에선 모든 안건이 스톱이다. 훨훨 날아가려는 자신에게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전부 올가미를 던지는 기분이다.
하안은 가족끼리 지켜야 할 대화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1순위는 '돈은?'이라는 말은 금지시키는 것이다. 법으로 못하겠다면 적어도 교과과정에라도 넣어서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미래엔 따뜻한 가정이 넘치는 대한민국이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풉, 사달라는 말이죠, 누나는 맨날 뭐 사자는 소리는 잘하잖아요 지가 살 것도 아니면서."
하준이 유튜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한다. 심지어 ‘풉’은 웃음소리가 아니라 그냥 단어로 내뱉는 게 더 사람을 열 받게 한다.
"이하준 너는 아가리 닥쳐라... “
하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금니를 꽉 물어보지만 하준은 유튜브에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는다. 저 이죽거리는 눈매를 속 시원히 한 대 치고 싶다. 허락만 해준다면 전치 4주는 넉넉히 나오도록 시퍼런 멍을 만들어 줄 수 있다.
"너 부모 앞에서 동생한테 그런 말 쓰지 마라!"
엄마가 뒤로 홱 하고 하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야, 가만 보면 하준이 저놈이 꼭 초사야, 지네 누나 성격 알면서 어디 건방지게 말이야."
아빠가 짐짓 하안의 편을 들면서 말한다.
"내 성격이 뭐가 어떤데?!"
하안이 이번엔 아빠에게 쏘아붙인다.
"풉, 몰라서 하는 소린가"
아... 또 저 입으로 내는 풉 소리.
"진짜 뒤진다 너"
하안이 서슬 퍼렇게 눈을 부라리자 그제야 하준은 눈을 슬쩍 깔며 입을 다문다.
하안은 자신이 어쩌다 이런 싱거운 대화에도 쉽게 신경이 날카로워지게 되었는지 경위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지만 별로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그냥 더 이상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차창 밖으로 멍하니 시선을 던지며 앉아있었다.
하안이 뒷좌석 창에 기대어 잠든 사이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아파트의 협소한 지상 주차장으로 하안이네 차가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잠결에 어렴풋이 보였다. 말이 지상 주차장이지 실제론 지하 주차장이 없어서 아파트 단지에 제 멋대로 금을 그어놓은 게 전부다. 명절이라도 되면 그 좁아터진 주차장에 차가 어찌나 빼곡히 들어차는지 차 빼 달라는 소동이 꼭 한 번은 일어난다.
하안이네 네 식구가 각자 짐을 들고 낡은 주공아파트 5층을 낑낑대며 올라간다. 여길 올라갈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5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게 정말 말이 안 된다. 요샌 빌라에도 설치되어있는 게 엘리베이터가 아닌가?
7년 전, 하안이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집에 돌아오니, 웬걸 이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분명 이사 갈 집을 보고 있다고만 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게 돼버릴 줄 몰랐다. 새 보금자리로 들어간다는 두근거림 같은 건 느낄 새도 없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따라간 새 집은 외관도 내부도 하안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 따윈 불만 리스트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사 당일에 사다리차 기사님이
"소파는 창문으로 못 들어가겠는데요?"
라는 말에 엘베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하안과 아빠 둘이서 낑낑대며 5층까지 소파를 옮기던 게 생각이 났다. 그때 이하준 새끼는 군대에 있느라 이 힘든 이사 작업에서 열외가 되었다. 그때 소파를 나르면서 '이건 뭔가 잘못됐다'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개고생 해가며 새 집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한 게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하안은 올해로 딱 서른이다. 힘든 줄도 모르고 폴짝폴짝 계단을 오르던 20대 때와는 달라졌다는 것이다. 술이라도 좀 마시고 계단을 오르는 날에는 3층이나 4층쯤에서 토를 한 번 하고 가야 할 것 같다.(물론 아직까지 그런 적은 없다.) 여름엔 또 어떤가? 마트에서 장보고 나서 짐을 들고 올라갈 땐 정말 곤욕이다. 음식물쓰레기 버리러 갈 때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최근 주택 청약에 당첨된 지희가 부러워졌다. 어느 날 한 번 지희가 단톡방에 어떤 사이트 링크를 보내왔다. 강동구 쪽에 들어선다는 아파트 단지 청약 신청 링크였다.
- 여기 청약 넣자
지희가 톡을 보냈다.
그때 들어가서 얼핏 보니 청약 경쟁률이 300:1이었다 30:1을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비볐지만 제대로 본 게 맞았다. 그때 하안과 나머지 친구들 셋은 ‘이게 되겠냐’ 싶어서 신청을 안 했는데, 지희가 그 청약에 당첨됐다. ‘됐어! 됐어!’라고 제5공화국 전두환 마냥 소리 지르는 지희를 보면서 하안은 그때 왜 더 적극적으로 넣으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애꿎은 내적 비명을 질러댔다.
내가 그때 왜 청약을 안 넣었을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지희는 언제 이사 가는 거지?, 청약되면 대출을 받아야 되는 건가?, 요새 아파트 가격 엄청 오른다던데 내가 살 땐 두배 세배가 되어있으면 어떡하지? 나중에 내가 살 집이 있긴 있을까? 그런 복잡한 부러움을 꾹 참고 있는 하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희는 요새 신나서 단톡에 톡을 보낸다.
- 야 냉장고 이게 이뻐, 아니면 이게 이뻐?
- 야 드럼 세탁기 살려고 하는데 뭐가 좋냐?
- 건조기 이 정도면 비싼 거임?
쇼핑몰 링크는 기본이고 직접 보러 가서 찍은 사진을 보내기도 한다. 최근엔 양문형 냉장고랑 식기세척기 그리고 세탁기와 건조기가 세트 상품으로 되어있는 비스포크인가 뭔가 하는 가전 시리즈를 보여줬는데, 지희가 직접 매장에 가서 옆에 서서 찍었다. 사진을 보니까 지희가 제법 덩치가 있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가전제품이 웅장해 보였다.
가전에 뭔 시리즈 타령이냐 싶었는데 그 사진을 보자 말이 쏙 들어갔다.
'이건 시리즈여야 해'
그래 비스포크는 반드시 저렇게 세트를 이뤄야만 한다. 다 같이 모여있을 때 저런 극상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저걸 하나하나 따로 산다든지 하는 건 잔인한 짓이다. 형제들을 강제로 찢어놓는 거랑 똑같은 거야. 하안은 자신이라면 저 가전 형제들이 오래오래 행복하도록 옆에 꼭 붙어서 지켜줄 자신도 있었다.
‘저기에다 빨래를 하면 얼마나 잘 돌아갈까?, 엄청 보송보송하려나? 에이, 세탁기가 중요한가 빨래를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가 중요하지, 아니 그래도 비싼 덴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저 커다란 드럼에다 검은 옷과 흰 옷을 아무렇게나 섞어 빨아도 하나도 이염되지 않고 각자 청아하게 빨래를 마치고 나오는 상상을 했다. 건조기까지 돌리면 늘 꼬기작거리며 엉겨 붙어있는 옷들도 쫙 펴져서 보송보송하게 마를 것이다. 이건 예전에 친구 집에서 한 번 경험해봤기 때문에 안다. 하물며 그것보다 몇 배나 좋아 보이는 비스포크라니 얼마나 더 좋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아마 건조기가 옷을 꺼내 주며 인사라도 건넬지 모른다. '주인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어이쿠, 옷이 따끈따끈하니 조심히 꺼내세요'라며 농담도 하고 말이다.
‘근데 염지희 엄청 잘 버나 보네’
지희는 강남구 소재에 치아 전용 보철물을 제작하는 회사에 다닌다. 3D 프린터로 치아에 들어가는 부품이나 보형물 같은 걸 설계하고 제조하는 회사라고 했는데, 사실 들어도 무슨 회사인지 잘 모르겠다. 지희가 예전에 나노 밀링머신이니 3D 구강스캐너니 하는 용어를 쓰며 설명해 줄 때도 머릿속으론 그저 지희의 연봉이 얼마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내가 만약 청약에 당첨이 됐다면 지희처럼 가전이며 가구며 싹 새로 사서 들어갈 수 있을까?
지희는 자기돈으로 사는 거라고 말했지만 왠지 그 사실을 쉽사리 믿을 수 없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에이 사실 부모님이 사는 거겠지 진짜 자기 돈만 가지고 했겠어?’
근데 부모님이 사는 거라고 해도 부럽긴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 집이었다면?
‘돈은 하안이가 내는 건가?’
안 봐도 비디오다. 정말 상상하기도 싫다.
방에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있자니 천장 귀퉁이 벽지 색이 바래진 게 눈에 띈다. 화장대 거울 앞쪽에 군데군데 먼지가 쌓여있는 것도 꼴 보기 싫다. 하안은 샤워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날을 위해 아껴둔 바디워시로 말이다. 생일 때 받아둔 ‘더티 스프링 워시’를 바로 오늘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아가며 아주 꼼꼼하게 구석구석 몸을 닦고 싶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하안은 침대에 털썩 누웠다. 오늘 그 바디워시를 쓴 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스피어민트의 상쾌한 향이 꿉꿉했던 하안의 기분을 확 환기시켜주는 것 같았다.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말아 올리고 하안은 핸드폰을 들어 친구들의 단톡방 '이글파이브'에 톡을 남겼다.
- 우리 지희네 집들이 언제가?
10분 뒤, 머리를 말리고 돌아온 하안이 카톡을 열어 확인했는데 아직도 안 읽음 표시에 4가 그대로 남아있다.
‘이글 파이브’는 하안과 지희, 소윤, 정아, 진아 이렇게 다섯 명이 있는 톡방이다. 원래 이름은 ‘5래5래’ 였는데 ‘이글 파이브’로 바뀌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어느 날 단톡방에 소윤이가 던진 화젯거리 때문이다.
- 야 ‘파이브’라는 단어 들으면 어떤 가수가 생각남? 샐럽 파이브 생각나면 학생이고 틴틴파이브 생각나면 아재래ㅎㅎㅎ
- 어 나는 마룬파이브 생각했는데?
- 야 이하안은 그래도 양반이네
- 야 ㅋㅋ 나는 이글파이브 생각했는데?
그러던 와중에 진아가 말했다.
- 야 너도? ㅋㅋㅋㅋㅋㅋ야 나두
진아의 말에 소윤이 같이 맞장구치며 말했다.
그때 우리는 청춘은 이제 갔다는 걸 기념하기 위해 다섯 명의 단톡방 이름을 함께 '이글 파이브'로 바꾸었다. 청춘이 간 건 씁쓸했지만 그래도 ‘Maroon 5’를 얘기한 자신이 제일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위안을 얻었다.
이글 파이브가 원래부터 다 같이 친했던 사이는 아니다. 하안과 지희, 소윤 셋은 송명여고 동창이고, 정아와 진아는 입시학원 다닐 때 친해진 친구다. 사는 동네도 거의 비슷하고 수험생 시절 마음 둘 곳 없는 여고생들은 자신과 조그만 공감대라도 형성되는 사람이다 싶으면 쉽게 서로의 '베프'가 되어주곤 했다.
힘들수록 의지할 곳을 찾는 게 아니라, 의지할 곳이 되어주려고 하다니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다. 하안이 친구들 얘기를 잘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고 했던 건 '내가 이만큼 너희한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없어선 안 되는 존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을 때도 ‘하안이 어딨어?’라며 자신을 찾거나 ‘하안이 없으니까 재미없다’하는 말이 나왔으면 싶게 만들고 싶은 마음 말이다. 하안은 아마 다른 애들도 다 자신과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입시학원에서 동고동락하던 친구들은 사이좋게 수능시험을 망쳤다. 딱 한 명 송진아만 빼고 말이다. 진아는 K대에 합격했다. 비록 최상위권 대학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서울이 어딘가? 그 당시 하안은 재수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신중히 고민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그냥 빨리 졸업하고 취직하겠다고 미래 계획을 이야기 한 터라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요즘은 대학보다 얼른 취업하는 게 더 중요해’라고 생각하며 이내 재수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그때 하안은 진로나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 친구들도 자신처럼 수능을 망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안도감이 더 컸다. 왠지 이들과 함께라면 부끄러운 마음을 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위안이 들었다. 친구들은 다 좋은 학교에 붙고 자신만 떨어졌다면 낙오자가 되었다는 박탈감을 아마 하안은 견디지 못했으리라.
침대에서 뒹굴며 유튜브를 보는 사이에 카톡 알림이 울렸다. 정아의 답장이었다.
- 이번 주랑 다음 주는 약속 있고, 다다음 주 토요일 어때?
하안은 좋다고 답변하려다가 멈칫하고 읽음 표시를 확인했다. 안 읽음 4였던 것이 1이라고 떠 있다.
‘이년들 봐라? 읽고서 답장 안 해?’
- 그래! 나는 좋아
하안이 먼저 답장했다. 이런 건 꼭 누가 먼저 총대를 매야 답장을 하더라. 하안은 자신도 여자지만, 여자들 무리 특유의 간 보는 문화가 꼴 보기 싫었다. 하안은 곧바로 지희와 소윤과 자신이 따로 있는 송명여고 단톡방에 또 카톡을 날렸다.
- 야 다들 다담주 토욜에 ㅇㅋ? 그날 가도 되지?
진아와 정아를 따돌리려고 따로 단톡을 판 게 아니라 지희, 소윤, 하안과 약속을 더 많이 잡기 때문에 따로 만든 것이다. 우리 셋은 사는 동네가 같아서 약속 잡기도 편하고 볼 일도 잦은데, 다섯 명 있는 단톡에서 저 둘만 쏙 빼고 우리 셋이서만 뭉치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 만든 것이다.
이내 2가 사라지며 답장이 온다.
- ㅇㅇ 오셈
- ㅇㅋ ㄱㄱ
이것들이 뻔히 카톡 봐놓고 이제 와서 대충 대답하는 게 어이가 없다. 그래도 편하니까 이렇게 보내는 거겠지. 솔직히 하안에게 툭 까놓고 친구들의 우선순위를 매기라고 하면 지희와 소윤이가 먼저 나올 것 같다. 아무래도 학교까지 같이 나온 동네 친구들에게 좀 더 정이 가는 것이다. 말투만 봐도 그렇다. 송명여고 단톡방에서는 ~냐 로 끝나는 문장이나 ㅇㅇ나 ㄴㄴ같은 자음만 쓰는 편한 말을 많이 하는데, 이상하게 이글 파이브에서는 그게 잘 안된다. 분명 똑같은 친구들인데 왠지 좀 더 가려서 말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랄까. 물론 이런 걸 내색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아마 소윤이랑 지희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이글 파이브에는 천천히 송명여고에는 칼답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카톡 알림이 또 울린다. 이번엔 이글파이브 단톡이다.
- 나도 담주 토욜 좋아. 지희 너 뭐 필요한 거 있어?
진아의 답장이다.
- 글쎄, 딱히 없는데? 돈으로 줄 수 있어?
염지희의 대답이 골 때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 지희 너 집에 디퓨져 있어? 디퓨져 하나 사갈게
진아가 끝내 집들이 선물을 고른다. 하안은 그냥 편하게 가고 싶은데 뭘 집들이 선물씩이나 사가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자신이 앞장서서 훼방을 놓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집들이 선물 같은 거 별로 할 마음이 없는 자신이 쫌생이 인가 싶었지만 ‘나도 나중에 우리 집 집들이할 때 친구들이 아무것도 안 사 와도 괜찮으니까’라고 생각하며 툴툴 털었다.
-남자도 안 오는데 뭔 디퓨져야 담배나 한 보루 사다 주라.
답장도 참 염지희스럽다.
-ㅋㅋㅋㅋㅋㅋㅋ야 그래도 있으면 또 쓴다 너
송진아도 참 꿋꿋하다.
다른 애들도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하안은 요 몇 년간 진아의 태도가 아주 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자신처럼 아주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만 느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진아는 K대에 입학하고 나서 뜬금없이 무슨 통기타 동아리 같은 걸 들더니 간부까지 맡아서 하다가 졸업했다. 하루는 진아네 동아리 MT 단체 사진을 봤는데 진아 옆에 엄청 잘생긴 남자가 있어서 누구냐고 물어보니 선배라고 했다. 그때 우리 넷은 동시에 질문을 쏟아냈다.
‘여자 친구 있어?’
‘나 소개시켜 줘!’
‘키 커?’
‘야 지금 불러!’
그때 진아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그냥 웃어넘겼는데 몇 년 전, 동아리 동창 모임에서 다시 만난 그 선배랑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명문대학교는 동아리도 동창 모임을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게 벌써 3년 전 일이다. 남자 친구는 지금 변리사라고 들었다. 변리사가 뭐하는 건진 잘 모르지만 어쨌든 고액 연봉자 냄새가 풀풀 나는 것만은 확실하다. 집도 꽤나 잘 산다고 들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때 진아가 엄청 부러웠다. 하지만 그녀를 선망의 눈빛으로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등한 존재로 있고 싶었다. 그래서 하안은 절대 그녀를 부러워하는 티를 내지 않고자 다짐했다. 그래도 혹시 부러움의 눈초리가 튀어나올까 봐 하안은 몇 가지 미리 칭찬할 거리도 생각해 놨다. 감기를 약하게 미리 걸려서 독감을 막는 예방주사처럼 말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진아의 외모를 칭찬하자는 것이었다. ‘그래 남자들은 다 얼굴 본 다니까’ 진아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피부도 하얀 전형적인 미녀상이다. 인기도 제일 많았고,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중에 제일 예쁜 것 같다. 그렇다고 자신이 진아한테 엄청 꿀린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하안은 은근히 글래머 한 자기 몸매에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성격은? 진아 정도면 성격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깝다. 하지만 난 내 성격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걸? 나 정도면 매력적인 성격이지.
하안은 곧바로 또 허탈해졌다. 어느새 또 자신과 진아를 비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친군데...
근데 그래도 자신이 남자여도 송진아를 좋아했을 것 같다.
그런데 올해 여름, 진아가 갑자기 내년에 결혼 준비를 한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사실 나이를 생각하면 폭탄선언이랄 건 없지만, 하안의 ‘실친’ 중에서 결혼하는 건 진아가 처음이어서 좀 놀랐다. 진아의 훈훈한 남친을 생각하니 부럽기도 했다. 그래도 한편으론 ‘그래도 결혼은 식장까지 들어가 봐야 아는 거라던데’라는 걱정도 들었다.
어쨌든 그 남자 친구를 사귈 때쯤부터 진아의 태도는 아주 묘하게 달라졌다. 그 표면적인 예가 바로 선물이다. 우리에게 주던 선물이 립밤, 핸드크림, 에코백 같은 것에서 립스틱, 향수, 지갑 같은 걸로 바뀌었다. 우리끼리 어디 여행 가자는 얘기를 할 때도 당일치기나 끽해야 제주도 정도 말하던 게, 갑자기 과감하게 힐튼 호텔을 이야기한다거나, 지난번엔 보라카이를 말하기도 했다.(비록 코로나 때문에 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게 거슬렸다고까지는 말할 순 없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내심 돈 걱정도 되었고 말이다.
진아의 단점을 굳이 꼽자면 집안 형편이다. 친구들끼리 티 내지 않고 쉬쉬하고 있었지만, 얼핏 듣기로는 진아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업에 잇달아 안 좋은 일이 겹치면서 휘청했던 게 아직까지 회복이 안 된 것 같다고 들었다. 그래서 같이 입시학원 다닐 때도 우리는 진아를 배려한답시고 늘 김밥천국이나 한솥 도시락 같은 싼 곳만 골라서 다녔다.
근데 그런 진아가 언제부터인지 묘하게 친구들에게 씀씀이가 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신도 그 수혜자 중 한 명이지만, 때론 진아에게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다른 친구들을 보면서 어쩐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사실 생각해 보니 그 이전에도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 진아를 제외하고 지방대에 들어간 우리 넷은 암묵적으로 학교명을 언급해야 하는 이야기라거나 그런 것들은 좀 피했는데, 송진아는 툭하면 자신의 학교를 들먹여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배려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고까웠달까. 한 번은 자신의 학교 이름이 새겨진 과잠바를 입고 와서 우리에게 잘 어울리냐고 물어봤는데 예쁘다고 해주던 입과는 달리 하안은 속으로 진아가 밉상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유치하게도 그때 하안은 아버지가 자신의 생일날 사준 명품 가방을 슬쩍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랑을 했었다.
우리는 진아의 집안 형편 같은 걸로 자존심 건드리기 싫어서 열심히 같이 가난한 생활에 동참해 줬는데, 송진아는 전혀 우리에게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달까? 하안은 ‘에이 그냥 내 과민반응이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버지가 사준 명품 가방을 자랑할 때 조용해지던 진아의 얼굴을 떠올리니 마치 변태처럼 짜릿한 쾌감이 뒷목을 지나 손끝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하안은 어쩌면 따로 송명여고 단톡을 파게 된 것이 꼭 약속을 잡기 편해서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과 지희와 소윤 이렇게 셋이 있을 때가 정아와 진아가 함께 있을 때보다 편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도 하안은 퇴근길에 지희와 소윤이를 불러냈다. 지희는 이사 준비가 한창이라 바쁘지만 괜찮다. 어차피 염지희네 집에서 볼 거니까. 코로나 시국이라 다들 어디서 저녁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는 하지만 딱히 이 셋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안이들은 늘 지희네 전세방에서 모였으니까 말이다. 하안은 지희가 이사 가고 나면 이제 이렇게 마음껏 모이는 것도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띵동-
하안이 지희네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에서 지희가 소리친다
“전데요?”
“아 x발 비밀번호 알잖아 그냥 들어와”
낄낄거리며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간다. 여자애가 겁도 없이 자기 핸드폰 번호 뒷 네 자리가 현관 비밀번호다. 하안과 소윤이 몇 번이나 바꾸라고 말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몇 년째 이러고 살았다. 다행인 건 놈팡이들이 찾아오지 않은 거라고나 할까. 이번에 이사 가는 지희에게 선물로 지문인식 현관 도어록을 사 줄까 생각도 했지만, 의외로 비싼 가격에 헛바람만 들이켰다. 애들한테 돈 모아서 같이 사주자고 할까 생각도 했지만 왠지 모양 빠지는 것 같아서 그것도 그만뒀다.
“소윤이는?”
하안이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몰라 금방 오겠지”
5분 정도 있다가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띡띠디딕-
“양반은 못되네”
지희가 웃으며 말했다.
“어우 야, 너 이사 가는 집에선 안에서 담배 좀 피지 마라 제발”
소윤이가 손사래를 쳐가며 말한다.
“야 걱정하지 마, 무조건 꽃향기만 나게 할 거니까”
“무슨 꽃 향기?”
하안이 묻자 지희가 기지개를 켜며 말한다.
“밤 꽃”
잠깐 무슨 뜻인지 생각하던 하안과 소윤이 동시에 말한다.
“이 미친년”
“또라이”
이제 이 정도 농담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고등학생 때는 지희의 이런 센 농담에 어쩔 줄 모르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던 하안이었는데 말이다.
셋은 배달의 민족에서 제일 리뷰가 많은 치킨집을 골라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시켰다. 맥주는 지희네 냉장고에 항상 부족함 없이 가득 차있으니까 사 올 필요가 없다. 염지희네 집에 생수가 없을 순 있어도 맥주가 없을 순 없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술은 ‘바바리아 8.0’이다. 의외지만 소주를 못 마시는 지희가 빨리 취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는 제일 높은 도수의 술이었다. 처음에 하안과 소윤도 지희를 따라서 한 두 모금 마시기 시작했던 것이 어느새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심지어 4도짜리 술은 미지근해서 먹고 싶지도 않다.
치킨을 뜯다 말고 지희가 물었다.
“야 골라 봐, 양념 vs 후라이드”
“나 후라이드”
하안이 바로 대답한다.
“난 반반”
소윤이도 대답한다.
지희가 치킨 덩어리를 탁- 소리가 나게 놓더니 소윤이를 쳐다보고 말한다.
“소윤아, 세상엔 반반이라는 건 없어. 자 딱 골라봐 양념하고 후라이드 어느 한쪽의 발판을 열어서 상어밥을 만들어야 한다면 누굴 죽일 거야?”
“아 죽이긴 왜 죽여 난 못 골라 난 반반 할 거야.”
그 모습을 본 지희가 하안을 쳐다보곤 동의해 달라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말한다.
“허어, 요 맹랑한 녀석을 좀 봐라 하안아. 야 그러면 이거 골라봐 탕수육 부먹 vs 찍먹”
“나는 찍먹! 부먹 극혐”
하안이 또 곧바로 대답한다.
“아 이딴 거 왜 함? 나는 이게 극혐이다.”
소윤이가 도저히 못 고르겠다는 듯 말한다.
하안은 은근히 지희를 거들어 소윤이를 놀리고 싶은 충동질이 일었다.
“야 이거 뭐라고 못 고르냐, 이런 것도 못 골라서 나중에 어떡할래?”
지희도 맞장구친다.
“그래! 반반 같은 돌파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거 착각이다 너?, 결국 인생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돼. 반반을 시켰더라도 마침내 딱 첫 입 뜯는 건 양념인지 후라이든지 하나만 골라야 되잖아. 입에다가 두 개를 다 쑤셔 넣고 있을 거야? 너 그렇게 교양 없는 애야 엉?”
“아 몰라 vs 같은 거 하지 마 나는 그런 거 잘 못 골라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어 나는”
“어이구 그러다 나중에 맹탕되는 거야”
“글쎄,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소윤이가 손에 묻은 양념을 쪽쪽 빨며 대답한다.
하안은 그 말을 들으면서 ‘이거 어디서 묘하게 듣던 말인 데’라고 생각하다가 번뜩 말했다.
“박소윤 이거 송진아한테 물 들었네.”
“진아?”
지희가 되묻는다.
“응, 저거 진아가 자주 쓰는 말이잖아 ‘글쎄 그건 ~마다 다르지’ 하는 거, 선택하기 싫을 때 그거만큼 빠져나가기 좋은 말이 없잖아”
왠지 이때다 싶어서 하안이 말을 쏟아낸다.
“야 여기서 이러니까 왠지 진아 뒷담 까는 거 같다 얘”
소윤이가 피식 웃으며 맥주를 삼켰다.
바바리아 8.0의 위력 때문일까? 얼근하게 술이 오른 하안은 그냥 속에 있는 말을 질러버린다.
“나는 그 말 진짜 싫어해, 그냥 어디든 갖다 쓸 수 있는 말이고, 물 타기 할 여지가 있는 말 아냐? 나는 그런 말 자주 하는 사람한테는 진짜 아무 얘기도 안 하고 싶을 거 같아. 좀 비겁한 표현 아냐? 뭐만 하면 다 ‘~마다 다르지’ 이 지랄할 거 아냐?”
마지막 말은 좀 셌나 싶어서 잠시 둘의 눈치를 보았다. 하안은 목이 탔다. 빈 캔 맥주를 옆에 내려놓고 냉장고로 가서 맥주를 뒤적였다. 그 사이 맥주보다는 사실 등 뒤에서 소윤과 지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더 신경 쓰이고 무서웠다.
다행히도 둘은 이내 소윤이네 회사에 새로 들어온 싹수없는 신입사원 이야기로 열을 올려가며 금세 의기투합했다. 하안은 그 얼굴 모를 쌍놈의 새끼 때문에 자신의 말이 조용히 묻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술자리를 마치고 소윤이와 하안은 집으로 갔다. 소윤이네와 하안이네 집은 거의 같은 방향이다.
“지희 가면 이제 자주 못 모이겠지?”
소윤이가 먼저 말한다.
“못 모이긴 너랑, 나랑 그냥 동네에서 보면 되지”
하안이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우리도 삼십 대 되니까 예전보다는 덜 보게 되는 거 같다. 옛날엔 진짜 맨날 붙어 다녔는데”
“맞아, 근데 사실 본 건 우리 셋이 더 자주 보긴 했지, 진아랑 정아는 나중에 낀 거고”
“그런가?”
소윤이 고개를 까딱 하곤 마저 걷는다.
“또 그 말투, 암튼 30대 되면 다들 상황에 따라 덜 보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우리만 그런가? 남들도 다 그렇잖아 다 그러면서 사는 거지”
하안은 상투적인 사회인의 표현을 써가며 소윤이를 다독였다. 순간 소윤이가 피식- 하고 굉장히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던 것 같은데, 하안은 내가 잘 못 봤겠지 싶어서 그냥 계속 걸었다.
하안과 소윤이의 집은 횡단보도에서 갈린다. 횡단보도 건너편 쪽이 소윤이의 집이고 자신의 집은 그냥 길 따라서 쭉 더 올라가면 된다. 소윤이와 집에 갈 때면 항상 이 자리에서 신호등이 바뀔 때까지 하안은 잠시 서서 기다려 주었다. 왠지 정적이 흐른다고 생각할 때쯤 먼저 입을 연건 소윤이었다.
“근데 아까 그 말”
“응? 무슨 말”
“남들도 다 그러면서 산다는 말 있잖아. 네 말 대로면 그 말도 물 타기 할 여지가 있는 비겁한 말 아니냐?”
불쾌하다. 더러운 하수구에 자신의 한쪽 발이 푹 빠진 느낌이다. 그런데 왠지 하안이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낯익은 기분이기도 하다. 이 기저를 알 수 없는 친숙한 기분 나쁨을 꾹 눌러내고 하안은 그냥 소윤이를 쳐다봤다.
“나 간다. 다음 주에 보자”
마침 신호등이 켜지고 소윤이가 건너간다.
하안은 소윤이가 건너가는 모습을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뒷모습을 알 것 같다. 예전에 명품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던 하안 자신의 모습과 어쩐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수치스럽고 화가 났다. 지희가 떠나고 나면 이제 소윤이와 자신 둘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아무도 남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이글 파이브도 송명여고 단톡방도 조용했다. 원래도 매일 카톡 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하안은 왠지 지금의 침묵이 평소 같은 안온한 침묵과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자신처럼 아주 예민한 사람들만 캐치 해 낼 수 있는 기류일 것이다. 이러다가 지희네 집들이 가는 날까지 단톡방이 조용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럴 땐 누군가 먼저 전혀 어색한 줄 몰랐던 척 말하면 괜찮은데 그 타이밍을 놓치면 정말 피할 수 없는 어색함이 우리를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때는 아마 서로 감춰놨던 더럽고 치사한 마음을 서로에게 증거물 제시하듯 하나씩 고백하고 나서야 그 어색함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글 파이브도 송명여고도 다시는 예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 없게 될 거란 걸 하안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안이 먼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진 않았다. 하안은 소윤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느꼈다. 비록 중학생 때는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중, 고등학교를 나오고 3년 내내 붙어 다녔던 자신을 말이다. 송명여고에서 지희를 소개해준 자신을 말이다. 지희뿐인가. 따지자면 정아와 진아도 자신이 먼저 다니던 입시학원에서 친해지고 나중에 소윤에게 소개해 준 친구들이다. 소윤은 자신보다 나중에 진아네들과 친해져 놓고, 정작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하안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점이 너무 괘씸하다고 느꼈다. 뭔가를 빼앗긴 기분인데, 누구에게 뭘 빼앗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런 기분으론 도저히 아무렇지 않은 척 말 걸 수 없다는 거다.
의외로 이 침묵을 먼저 깬 건 이글 파이브에 보낸 지희의 톡이었다.
- 야 집 정리 다 됐는데 그냥 이번 주 오실? 담주까지 안기다려도 될 듯?
- 어 나는 시간 돼 근데 저번에 누가 안된다 그러지 않았어? 진아였나?
정아가 곧바로 이어서 대답한다.
- 맞아 ㅋㅋ나였어, 근데 갈 수 있을 거 같아
- 나도 갈 수 있어
이쯤 되면 내가 나서는 게 어색하지 않다 싶은 타이밍에 하안도 답장을 남겼다.
- ㅇㅇ ㄱㄴ
소윤은 자음으로 답장을 남겼다.
- 낼 금요일이니까 금요일 저녁에 와라 다들 어때?
지희가 날짜를 정했고. 어쩐 일인지 다들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안은 지희네 집들이가 기대된다기보다, 이 썩 유쾌하지 않은 분위기가 어찌 됐든 빨리 반전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띵동-
하안이 지희네 새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새 아파트라 그런지 초인종 소리도 맑고 경쾌하다. 처음 찾아가는 길이라 동 호수에서 못 찾고 헤매면 어쩌지 했는데, 단지 도보가 어찌나 시원시원하게 뚫려있던지 할머니, 할아버지도 헤매지 않고 찾아올 것 같았다.
“누구세요”
안에서 지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철컥
“꺄! 하안이 왔어?!”
진아다.
하안은 최대한 밝고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집에 들어왔다. 너무 깨끗하다. 좋은 향기가 난다. 아름다운 집의 모습이란 이런 게 아닐까? 이게 그 꿉꿉하고 담배냄새 찌들어 살던 염지희네 집이 맞나 싶다. 저기 멀리 지희가 단톡방에 닳고 닳도록 올렸던 비스포크 냉장고의 모습이 보인다.
“어 왔어? 야 젓가락 좀 놔줘”
지희가 대충 인사하고 부엌에서 뭔가 바쁘게 접시를 날랐다.
“야 이게 다 뭐야! 그냥 대충 먹지!”
잡채부터 불고기, 고등어구이에 탕수육, 곱창볶음 하안이 좋아하는 겉절이 김치에 각종 늘어놓은 반찬까지 세자면 끝이 없다.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아 이거 진아네 부모님이 싸주셨어 겉절이 먹어봐라 진짜 끝내준다.”
하안은 아 그래? 하고 이내 궁금증을 거뒀다.
주변을 둘러봤다. 아일랜드 식탁 위로 달려있는 조그만 장식용 선반 위로 조 말론 디퓨져가 보인다. 아까 났던 좋은 냄새가 바로 저 디퓨져의 향이 아닐까 싶었다. 저것도 진아가 선물해 준 거겠지? 하안은 어쩐지 빈 손으로 들어온 자신이 싫어졌다. 시간을 돌려서 크리넥스라도 한 포대 사 올 걸 그랬다. 아니 크리넥스가 아니라 시간만 좀 더 준다면 자신이 아끼는 러쉬의 ‘더티 스프링 워시’ 바디워시라도 사 올 수 있다. 그리고 지희한테 가져가서 얼른 이 향 좀 맡아보라고 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희가 이 향이 얼마나 끝내주는지 이따가 친구들에게도 자랑하는 상상을 했다.
이윽고 정아와 소윤이도 들어왔다. 다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서 캔 맥주를 깠다. 음식이 어찌나 많은지 앞에다 캔 맥주를 둘 곳도 없어서, 꽤나 엉거주춤하게 들고 있었다.
“지희의 새 집을 위하여!”
정아가 캔을 높게 들어 소리친다.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야 나를 위해야지 왜 내 집을 위해!”
다 같이 캔을 높게 들어 건배했다. 맥주는 모두 바바리아 8.0이었다.
6시에 모인 술자리가 어느새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바닥에는 우리가 마신 캔 맥주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이렇게 깡통이 가득 깔린 집을 보니 하안은 어쩐지 이제야 지희의 집에 놀러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윤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다. 의외로 술이 센 진아와 정아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지희의 술주정을 들어주고 있다. 술만 취하면 과거 남자 친구들이 어땠는지 주절주절 읊어대는 게 지희의 술버릇이다.
하안은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룻바닥을 삭삭 느끼며 걸었다. 하안의 집에 깔아 놓은 나무 무늬 장판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짜 마루였다. 베이지색 바닥을 사각사각 걸어가며 하안은 화장실까지의 거리가 더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에 가기 전 옆에 조그맣게 열린 창고 같은 곳이 있었다. 남의 집을 여기저기 훔쳐보는 것은 실례지만, 지희와 자신은 남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미 하안의 손은 그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거긴 조그만 세탁실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놓여있는 건 큰 세탁기와 건조기였다. 저 비스포크 냉장고와 형제였던 그 가전제품 말이다. 나란히 검은색 자태를 뽐내며 두 대가 놓여있는 세탁실은 성역 같기도 했다.
술이 깨는 느낌이었다. 이런 곳에서 빨래를 돌린다면 그 어떤 더러움이라도 세탁되어 사라지겠지? 그리고 세탁실이라니, 세탁실이 별도로 있는 집이 있다니. 하안은 홀린 듯이 세탁기의 전원 버튼을 눌러보았다. 띠리링- 맑고 큰 소리가 난다. 혹시 밖에서 듣지 않았을까 놀랐는데, 흘끗 보니 세 사람은 여길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런 큰 통이라면 아마 이불 같은 건 두 개씩도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탁실과 마룻바닥, 부엌에 있는 커다란 냉장고와 선반 위에 놓여있는 디퓨져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안은 이내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왠지 지희의 집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있을 곳은 이 집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들아 나 오늘 먼저 갈게, 내일 중요한 약속 있어서 너무 늦으면 안 될 거 같아”
하안이 슬그머니 돌아와서 운을 뗐다.
“아 뭐야! 가긴 어디룰 과?”
“구뢔! 어딜 가”
지희와 정아가 둘 다 혀가 꼬인 발음으로 제지에 나선다.
“내일 몇 시 약속인데? 너도 자고 가 지희가 우리 오늘 자고 가도 된데 이불도 새 거 사놨대”
정아가 속도 없이 하안을 붙잡는다.
“아냐 아냐 나 요새 하도 늦게 돌아다녀서 눈치 보이기도 하고, 내일 일찍 나가야 돼 또 올게”
너무 매정하게 나서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도록 친구들을 한 번씩 꼭 끌어안으며 하안은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겨 나왔다.
이런 야간에 택시를 타면 하안의 집까지는 할증으로 2만 원이 훌쩍 넘게 나왔지만 개의치 않고 택시를 잡았다. 별로 술에 취한 게 아닌데도 묘하게 머릿속이 멍하다. 이 차가운 철 덩어리가 남부순환도로를 쌩쌩 달리는 지금이 오늘 하루 중에 제일 편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희네서 나온 게 언제였나 싶게 빨리 집에 도착했다. 어쩌면 지희네 집에 오늘 다녀온 일이 꿈같았다. 5층 계단을 낑낑대며 올라갔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하안은 자신의 방에 쓰러지듯이 들어갔다. 가방을 대충 아무 데나 패대기쳐 두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그러다가 잠시 바디워시를 듬뿍 발라서 샤워를 할까 생각했지만.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하안은 그날 꿈을 꿨다. 상아로 깎아낸 듯 아주 매끄럽고 보드라운 재질의 큰 세탁기가 자신의 눈앞에서 이불을 빨래하고 있는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