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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김춘식 Dec 04. 2020

서럽다 바지야

닭 대신 꿩이었길 바라며

온라인 몰에서 바지 두장을 구입했습니다. 바지를 구입할 때마다 원하지 않지만 필수로 선행되어야 입을 수 있는 두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바지 허리둘레 크기가 짝수로만 생산되더군요. 30 다음에 32로 31은 없는 거죠. 31은 어쩌란 말인지요? 살을 뻬던지, 더 먹고 찌우던지 구매자가 알아서 해라? 이런 배려인 것 같습니다. 제작 공정을 줄이기 위한 조치라 여겨지지만 고객의 다양성을 무시한 제작사들의 처사가 아닐까요? 청와대 국민신문고 민원이라도 올려볼까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32를 31로 허리 크기를 줄이는 일입니다.


바지를 구입할 때마다 상실감이 꽤나 큽니다. 수십 년째 해온 일인데 말입니다. 바지 구입 시의 희망은 길이를 줄이지 않고 입는 것인데 그게 지금 와서야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바지 두 개를 거실 바닥에 나란히 놓고 지금 입는 바지와 길이를 맞추고 잘려 나갈 길이를 재고 접습니다. 헉, 잘려 나가는 옷 감의 접힌 길이가 길어지네요. 억장이 무너 집니다. 왜 잘려 나간 천 만큼 바지값 할인을 안 해주는 거죠? 이것도 민원감입니다.


최근 유행하는 남자 바지 길이는 복숭아 뼈 위로 올라오는 짧은 것이지요. 바지 끝단을 복숭아 뼈 위로 올렸습니다. 겨울 바지는 또 두껍습니다. 이 두 가지가 문제죠. 짧은 바지의 유행과 두꺼운 겨울 바지는 짧은 다리는 더 짧게 긴 다리는 더 길게 보이게 하는 커다란 장점이 있죠. 길게 보이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더 짧게 보이는 쪽에 속한다는 게 함정입니다. 진짜 바지단을 접고 본 바지의 길이는 짧아도 한참 짧게 보입니다. 두 번째 할 일이 바지 길이를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코로나로 미루다 받은 건강검진의 결과가 이제야 나왔습니다. 사용 연식에 발생하는 여러 상태가 좋지 않은 숫자들이 결과지에 보입니다. 콜레스테롤도 높아지고 결절도 생기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걱정보다 더 정신을 나가게 만드는(멘붕) 숫치가 있었습니다. 무려 키가 작년 대비 0.1cm 쪼그라든 것입니다. 하아~ 앞으로 더 클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암울한 것이죠. 청천벽력입니다. 잃어버린 0.1cm. 차라리 뒷 꿈치를 검사자 모르게 살짝 들걸 그랬습니다.


Y군은 무의식적으로 코 끝을 밀어 드는 나의 행동을 정색하며 싫어라 하고 그리하지 않기를 매번 지적질합니다. 내세울 것 없는 외양에 코까지 더 못나게 하면 안 된다는 배려의 사유입니다. 이 번 생을 걸렀습니다.  숏다리에 코까지 낮은 다 그저 그런 모양새 말입니다. 제작사인 부모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다음 생은 롱다리 기린으로 태어나야겠습니다.


왜 사람은 다리가 길어야 하고 잘 생겨야 할까요? 인생의 길고 긴 세월에서 답을 찾지 못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말을 하면서도 잘 생긴 사람을 보면 부럽고 좋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 대체 수단으로 신세타령이랑은 내려놓고 내실을 다지는 방법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꿩이 아니면 닭이라도 되어야 하니까요.


일에는 국내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고, 글도, 사진도, 운동도 언제나 최선을 다 하려고 했습니다. 세월이 엄청 지난 후 지금 한 일들이 처음부터 닭이 아니었고 꿩이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짧디 짧은 바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언짢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키 170의 소원을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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