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에, 이런 말을 했어.
"퇴원하면 그림을 좀 보러 다녀야겠다."
난 그 말에 아무 대답을 못 했어.
아빠는 자신이 나을 거라 생각한 걸까?
아빠는 그때 걸음을 못 걸어서 휠체어를 타고 있었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고, 숨 쉬는 것도 벅차 했거든. 그런데도 그런 꿈을 꿨던 걸까. 희망 없는 병실에서 아빠가 유일하게 하고 싶어 했던 건 병실 복도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보러 가는 거였어.
나는 간호를 하느라 지쳤지만 아픈 발을 끌고 옆 동으로 아빠의 휠체어를 끌었지. 그때는 너무 피곤하고, 짜증도 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한테 보채 줘서 고마워. 그렇게라도 아빠랑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거든.
Dr. Seuss 가 이렇게 말했어.
”You will never know the value of a moment, until it becomes a memory"
추억이 될 때까지 결코 이 순간의 가치를 알지 못할 것이다.
지나고 보니까 그게 다 추억이더라고.
아빠는 유독 한 그림 앞에 오래 머물렀어. 나체인 여성이 침대에 누워서 관객을 똑바로 보고 있는 그림이야. 그 그림 앞에서 한참을 앉아있었어. 그땐 그게 왜 좋을까 궁금했는데 물은 적은 없어. 살짝 이상한 상상도 했어. 그런데 힘없는 아빠에게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을 거라 생각해.
왜 하필 그 그림일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오랫동안 생각해봤어. 그런데 최근에 그 해답을 알 것 같아. 아빠는 당당함을 꿈꾼 게 아닐까 해. 나체를 하고도 저렇게 당당하고 쳐다보는 여인이 부러웠던 것 같아.
아빠는 아프고 나서부터 마음이 항상 불편했을 거야. 몸은 아픈데 돈을 벌지는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으로써의 스트레스가 많았어. 그래서 항상 주식 시장을 기웃거리곤 했지. 암환자로써 가족에게 조금은 보탬이 되고 싶었나 봐. 아빠는 그렇게 죽기 전까지도 돈 때문에 애간장을 태웠어.
나도 요즘 이 그림을 다시 보기 시작했어. 뭐랄까... 저 당당한 여인을 보면서 나를 돌아봐. 갑자기 일이 끊기면서 하루 종일 누워있는 게 다거든. 일에 의욕도 안 생겨. 그래서 자존감이 떨어졌어. 내가 지금 이러는 게 맞는지 모르겠고 이런 내가 한심해. 아빠도 그런 마음으로 저 그림을 봤을까.
한동안은 말이야...
내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들었어. 남들이 보기에는 딱 게으른 백수 꼴이거든.
아냐. 백조지 나는.
하루에 하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글 한쪽 쓰는 게 다야.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이고 하는 것 없이 보이겠지만 물 밑은 끊임없이 발장구로 바쁜 백조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많은 생각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어.
히어로 영화를 보면 말이야, 영웅들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잖아. 그런데 매번 바쁜 건 아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그 힘을 사용하더라고. 매일매일 그 특별한 힘을 사용하진 않아.
오히려 그들은 조용한 외곽에서 자신들이 필요한 순간을 오랫동안 외롭게 기다리지.
나도 지금 그 시간이라고 생각할래. 특별하게 힘을 쓰기 위해 체력을 비축하는 중이라고.
너무 처지지 않게만 노력할게.
다음 주에는 아빠의 소원대로 내가 전시회를 가보려고.
스텔라,
너는 아빠랑 같이 전시회를 가보는 게 어떻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