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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Sep 16. 2022

사소하면서도 깊은 배려심

2022년 9월 15일 목요일의 기록

  아침 일찍(7시쯤이었나) 눈이 떠졌다. 아무래도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는 자고 있었고, 나는 일어나서 제일 먼저 전자담배를 꼬나물고 피웠다. 그러면서 내가 니코틴 의존도가 높긴 하구나 싶었다. 테이블에는 어제 먹다 남은 해물찜과 소라 숙회가 놓여 있었다. 나는 약간 배가 고파 남은 음식물을 처리하기로 했다.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맛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어제 있던 일을 일기로 작성해 브런치에 올렸다.


  어제는 그와 극적인 화해를 하고서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일을 하고 와서 피곤해서 그랬는지 내가 먼저 곯아떨어졌다. 그는 잠든 나를 한 번도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잠을 한 번도 설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렇다. 그는 그런 사소하면서도 깊은 배려심이 있었다. 나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그의 입술에 살며시 내 입술을 포개었다.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핸드폰으로 계속 글을 쓰며 그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10시쯤 되어서 나는 그의 볼에 마구 뽀뽀를 퍼부었다.


  "일어나셔야죠~ OO 씨."

  "조금만 더요."


  그는 아이처럼 잠투정을 부렸다. 그러면서 그는 나를 침대에 눕혔고, 우리는 어제 못다 한 관계를 가졌다. 만족스러운 관계를 마치고, 나는 욕실로 씻으러 들어갔고, 그는 대충 비누거품으로 면도를 하는 나에게 쉐이빙 폼을 써야지 턱에 상처가 생기지 않는다며 그것을 챙겨주었다. 나는 그걸 받아 들고 가만히 웃었다. 그의 섬세함과 배려심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씻고 나와 TV 예능 프로그램 '텐트 밖은 유럽'을 보고 있는 동안, 그는 씻으러 들어갔다. 연예인들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티본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이 방송에 나왔다. 그때,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욕실 밖으로 나왔다.


  "맛있겠다. 티본스테이크."

  "우리 저번에 비슷한 거 먹었잖아요. 토마호크."

  "아 그랬지. 맛있었는데, 토마호크. 그러고 보니, 우리 함께 간 맛집 많았지. 금고깃집도, 오레노 라면도, 돈우마미도. 다 맛있는 집들이었어."


  나는 그와 함께 간 맛집들이 전부 좋고 행복했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만큼 그와 함께 하는 게 행복했기에.


화곡동 냉면, 국밥, 만두 맛집 '한 국밥'


  우리는 12시쯤 체크아웃을 하고, 근처 식당 '한 국밥'에 가서 물냉과 비냉, 갈비만두를 주문했다. 원래 직화구이 냉면이라 고기가 나와야 하는데, 고기가 지금은 안 된다고 해서 그냥 냉면만 시켰다.


  그 사이, 그는 핸드폰으로 웹툰을 보고 있었고, 나는 그가 뭘 보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거 재밌어?"

  "네, 재밌어요."

  "어떤 웹툰이야?"

  "나 혼자 레벨업. 엄청 잘 그리죠? 이 작가가 되게 유명한데, 얼마 전에 죽었어요."

  "정말?"


  검색해서 웹툰 작가를 찾아보니, 장성락 작가라는 분이었다. 장 작가는 과로로 인해 뇌출혈로 37살의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나와 있었다.


  "그리고 이 웹툰, 일본에 수출돼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대요."

  "오, 대단하네."


  자기가 알고 있는,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그였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을 때 음식이 나왔고, 우리는 맛있게 냉면과 만두를 먹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홍대입구역 근처로 갔다. 그는 기타 수업을 들으러(기타를 배우는 게 그의 취미였다) 음악학원에 갔고, 나는 1시간 동안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그를 기다렸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는 그가 내게 추천해준 '생각정리일기'를 쓰기로 했다. 하루에 일어난 일과 그 일들에 대한 생각을 써나가는 것이었다. 계속 글을 써나가니, 평소에 많았던 잡생각들이 간단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1시간이 지나 그가 카페에 돌아왔고, 그는 기타 수업 얘기, 빵과 관련된 얘기(언젠가 베이커리 카페를 차리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리고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얘기들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하느라 좀처럼 입을 다물지 않았다. 나는 그게 또 귀여워 보여서 내내 긍정적인 호응을 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내 상황에 대한 조언을 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ISTP의 관심의 표현이 걱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만약에' 같은 단서가 달린, 노파심 가득한 걱정이라면 더 이상 사양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가 최대한 상처받지 않도록 돌려서 말하기로 했다.


  "네가 내가 걱정이 돼서 나에게 조언을 해주는 건 고맙고 좋아. 그런데 내가 조금 어깨가 무거워지려고 해. 그러니까 조금 책임감 같은 게 생겨서 힘에 부친다고 해야 할까. 암튼 그래요."

  "알겠어요. 이제 조언 안 할게요."

  "아니, 이제 조언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해주면 좋지요. 다만, 지나치게 많이 안 하면 좋겠다는 거예요. 조언해주는 거 좋아요."


  그는 왠지 표정이 약간 굳어 있었다. 조언을 거절당해 상처받은 듯했다.


  "왜 그래용? 화났쪄용?"

  "아뇨."


  나는 그의 화를 풀어주려 애교를 부렸다. 그는 애써 나의 시선을 회피하며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나는 또 그런 토라진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나는 그의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카페에 보는 눈이 많아서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홍대 일식 맛집 '온정 텐동'


  카페에서 3시간 정도 있었을까.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5분 정도를 걸어 '온정 텐동'이라는 일식집에 도착했다. 나는 일단 외부에서부터 사진을 찍고 들어갔다. 그는 키오스크에서 에비동(내가 새우를 좋아하는 걸 알고 주문해준 그)과 온정 텐동을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자,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물론 처음 먹는 것도 아닌데) 텐동 먹는 법을 알려 주었다. 수란에 찍어 먹으면 맛있다, 김 튀김이 맛있다 등등 나에게 이것저것 얘기해 주었다. 나는 그게 그의 관심이라고 생각해서 또 한 번 기뻤다. 튀김은 정말 맛있었다. 바삭하면서도 속은 부드럽고, 짭조름하면서도 달짝지근했다. 워낙 맛있었는지 우리는 각각 밥 한 그릇 더 추가해서 먹었다. 물론 그는 식사를 끝내고 식당에서 나와 한 마디 아쉬움을 토로했다.


  "쯔유 소스가 생각보다 진하지 않아서 아쉬웠어요. 그리고 예전하고 맛이 좀 바뀌었네요."


  자기 의사 표현이 확실한 그였다. 나는 그곳에서는 처음 먹어 보기에 잘 몰랐지만.


  그가 '푸하하 크림빵'에 들러서 크림빵을 사자고 했다. 크림빵을 샀고, 그가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지하철역으로 향했고,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를 기다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갔다. 홍대에는 정말 사람이 많구나 생각했다.


  그가 돌아오고, 우리는 크림빵을 한입씩 돌아가며 나눠 먹었다. 나는 그에게 오늘도 같이 있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는 알겠다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지하철을 타고, 그의 동네에 도착했다. 그는 내게 버블티를 사 주었다. 버블티를 마시다가(정확히는 펄을 씹으면서) 그의 집에 드디어 도착했다.


  그와 함께 살고 계신 친형께 인사를 드렸다. 그가 방문을 어찌나 빨리 닫았던지 인사만 나누고 나는 방 안에 있었다. 그는 오는 동안 땀을 많이 흘린 내게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주며 씻으라고 하고선 자신은 탁구(원래 그는 매주 목요일 오후 8시 30분 탁구를 치러 간다)를 치러 갔다. 나는 샤워를 하고, 그를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그와 보낸 하루가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 이 일기는 우리의 사랑을 하루하루 기록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추억이 오래도록 이 매거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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