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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소하일기 12화

청개구리 아들의 고해성사

2025년 1월 17일 금요일

by 제갈해리
청개구리 아들의 고해성사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속을 정말 많이도 썩였다. 갓난아기 시절에는 잠을 통 자지 않고 밤새 울기만 해서 부모님의 정신을 온통 쏙 빼놓았고, 미운 일곱 살 에는 동네 아이들과 자주 싸워 어머니가 매번 동네 어른들께 죄송하다는 사과를 드려야만 했다. 국민학교(3학년 때 초등학교로 바뀌었다)에 막 들어가서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학급 친구들과 싸우거나 학교에 지각을 자주 해 담임 선생님께 어머니가 불려 가야만 했다. 그나마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 문예반에 들어가 글공부를 제대로 배우면서 내 주의력 결핍은 고쳐질 수 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어떠했을까. 중학교 1학년 초반 무렵, 학급 친구와 심하게 다퉈 그 친구의 얼굴이 멍이 들 정도로 흠씬 패 주었더랬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아버지에게 연락하셨고, 아버지는 일을 하던 중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학부모 소환에 응해야 했다. 중학교 2, 3학년 때는 공부방 그룹과외를 해서 그런지 공부에 곧잘 취미를 붙여 학교 성적이 학급에서는 5등 안, 전교에서는 30등 안(전교생이 500명이 넘었을 때였다)에 들었다.


고등학교 때는 매일 지각하는 습관만 고치면 나무랄 데가 없을 정도로 교우관계와 성적이 매우 좋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동창들은 지금도 연락을 하고, 만남을 지속하면서 끈끈한 우정을 이어 나가고 있다. 성적은 (엄마가 아프셨던 2학년 2학기 때 극도의 스트레스로 반 15등으로 떨어졌던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전교 20등 안팎의 상위권이었다.


중고등학교 무렵에는 교내는 물론, 지역 글쓰기 백일장이나 대회에 나가서 상도 많이 탔는데, 그중 인천 평화백일장에서 에세이가 아닌 소설을 써서 특선을 타기도 했다. 또, 학업 성적이나 시화전 등에서 우수상을 많이 타기도 했다. 학교에서 내 필기 실력은 거의 완벽에 가까워서 주변 친구들이 수행평가를 할 때면 내 필기를 베껴 가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중고등학교 때 몇 년 남짓 부모님에게 안심을 드리고, 안정감을 찾게 해 드렸으면 뭐 하겠는가. 나는 빠르게 변해가는 교육과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신 준비와 병행해서 수능 준비를 온전히 해내지 못했다. 내신은 완벽에 가까운 1등급이었지만, 수능 문제의 유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수능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했다. 게다가 수시를 지원하면 치르게 되는 논술이나 면접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 수시 1차, 2차에서 대부분 낙방하고 말았다. 수능 시험 결과도 좋지 않아 나는 결국 (수능 시험이 만족스럽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강한 주장과 학원 강사였던 친척 형의 권고로) 재수를 선택하게 되었다.


재수를 선택했지만, 나는 학원 재수종합반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 당시 나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과 맞물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심해져서 학원 관계자나 동기 학생들 등 일체의 사람들을 마주치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치듯 재수종합반을 나왔다. 아버지는 크게 나의 행동에 실망하셨고, 그 뒤로 1년간 아버지와 나는 한 마디도 대화를 하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동창들의 소개로 동네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동안 나를 괴롭혀왔던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은 극복했지만, 대학을 진학하는 것은 보류한 상태였다. 1년이 지난 후에야 아버지와 화해를 하면서 나는 다시 대학 진학을 위해 삼수 생활을 했는데, 이때도 재수종합반의 타이트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학원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격해로 재수, 아르바이트, 삼수, 아르바이트를 한 끝에 나는 내신 성적 100% 전형이 있는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수시에 지원하게 되었다. 내신이 1등급인지라 어쩌면 당연하게도 쉽게 수시에 합격하게 되었고, 나는 2011년에 이르러서야 대학이라는 곳에 입성하게 되었다.


전문대학이기는 했어도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는 강의의 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훌륭한 교수진과 함께 다양한 글쓰기 수업과 대학에서의 행사 및 활동을 할 수 있어서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대학 공부를 하겠다는 초심을 잃고, 대학에 와서 동기들과 술 마시고 노는 것에 치중했다. 그 결과, 나는 학사경고를 받을 만큼 성적이 위태로워졌고, 동기들과의 교우관계마저 엉망이 되어 버려 1학년만 다니고 휴학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해인 2012년 6월, 나는 (강한 남자가 되어 오라는 아버지의 기대에 힘입어) 군대에 입대했는데, 선택은 아직까지도 내 일생일대의 후회로 남는 선택이었다. 나는 당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로 입대했는데, 훈련소에서 생지부(군대의 생활기록부 같은 것)에 '나는 동성애자입니다.'하고 사실대로 고백한 것에서부터 모든 것은 틀어져 버렸다. 조리병(취사병)으로 보직을 받은 나는 군수학교에서 조리병 교육을 받고 경기도 하남에 위치한 자대에 배치받았는데, 나는 자대 중대장님에게도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고백해 버렸다.


그러자, 나는 어느새 자대에서 A급 관심병사가 되어 있었고, 관심병사가 된 나는 모든 간부와 병사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도 바로 소문이 나서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나를 따돌리기에만 급급했다. 나는 계속해서 우울증이 악화되었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처방받은 정신과 약을 매일 복용해야만 했다. 그렇게 군생활에 지쳐가던 나는 도저히 외로운 군생활을 견딜 수 없어 결국 근무지를 이탈하는 좌충수를 두었는데, 그때 나는 주말마다 성가대로 활동하던 부대 내의 교회로 향했다. 추운 겨울, 교회 화장실에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부대원들에게 발각된 나는 대대장님께 불려 갔는데, 대대장님은 내게 진지하게 제대하고 싶냐고 물었더랬다. 나는 도저히 군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아 '제대하고 싶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그 뒤로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국군수도병원과 국군청평병원, 서울성모병원 정신병동에 보내진 나는 몇 개월간 그곳에서 생활했고, 마지막에는 수도방위사령부의 한 생활관에서 현역부적합 대상자들과 함께 2주간 생활하다가 결국 '공익근무요원 편입'이라는 조건으로 불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내가 관심병사가 되고, 주변 장병들이 나를 멀리하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내 보직이 바뀌고, 국군수도병원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주변 장병들의 감시를 받고, 결국 교회로 근무지 이탈을 하는 과정 가운데에서 우리 가족들은 나에 대한 걱정을 한시도 놓지 못했다. 특히 아버지는 나를 면회하시면서 우리 부대 중대장님과 자주 면담을 하셨는데, 내가 군대에서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셨더랬다. 군대에서 불명예제대를 하게 된 것이 부모님, 특히 아버지께 큰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아 지금도 마음이 쓰리다.


군대에서 제대한 뒤, 공익근무요원이 되어 어릴 때 다니던 초등학교의 행정실에 소속되었을 때, 나는 몰래 다른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그 아르바이트 업무가 체력적으로 힘들어 공익근무에도 악영향을 주게 되어 결근이나 지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결근과 지각이 잦아져 벌점을 받게 되었고, 그 벌점이 쌓여 경고 수준까지 이르렀다. 나는 결국 두 번의 분할복무 끝에야 소집해제를 하게 되었다.


그 뒤 20대 중후반, 그리고 30대 초반 무렵은 각종 아르바이트와 직장들을 전전하며, 게이바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같은 게이들과 어울려 유흥을 즐겼던 시간들이었다. 게이바를 출입한 것은 20살부터였지만, 자주 찾게 된 것은 20대 중후반부터였다. 게이바에 오게 되면 다양한 남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중 가라오케에는 술과 노래가 있어서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결국 나는 내 20대 청춘을 노는 데에 갈아 넣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날을 새고 술에 취해 들어올 때마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셨고, 매일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며 속상해하셨다.


오랜만에 28살이라는 나이에 복학해 들어간 대학은 모든 것이 생소했다. 5년 전에 다니던 대학은 학생들부터 강의과정까지 모든 것이 변해 있었고, 나는 대학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하려고 마음먹었던 다짐과는 다르게, 나는 대학 대면식에서 술주정을 부려 모든 선후배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조현병이 찾아왔다. 조현병으로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면서 나는 또 한 번 가족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게 되었고, 이는 도저히 씻을 수 없는 또 한 번의 불효였다.


그렇게 무거운 정신질환까지 얻고 나니, 어느덧 나는 전문대학을 가까스로 졸업한 30대가 되어 있었고, 30대의 내 생활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연속이었다. 지금 현재 한 편의점에서 4년 차가 되어 가는데, 지금 다니고 있는 편의점의 사장님께서 나의 사정을 많이 봐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벌써 잘리고 백수 생활을 거듭했을지 모른다. 그 정도로 나는 아직까지 일하는 데 있어서 기복이 심하고, 일상생활을 제대로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저지른 장본인으로서,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무한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통감한다. 내가 인생의 그 길목마다 그러한 선택과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왜 하필 그때 이런 선택을 했을까' 하고 후회해 본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은 돌이켜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족들과 지인들의 상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내 인생을 바로잡아 나아가는 것이며, 나를 포함해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다. 부디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고 미래에 나의 인생을 새롭게 도해 내길 바란다.


-지금까지 청개구리 아들의 고해성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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