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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버킷리스트

나의 특별했던 사람을 떠나보내며

by 제갈해리

2021년 12월, 나와 애인은 합의하에 헤어졌다.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와 나는 수많은 갈등과 화해를 겪으면서 결말까지 다다랐다. 물론 헤어짐이란 단어로 시작한 글에서 이별의 이유를 궁금해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는 우리가 헤어지게 된 이유가 뭘까 곱씹는 것보다 우리가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과 추억들을 돌이켜보고 싶다.


2018년 1월 29일 처음 만났을 때, 나의 모교 문예창작과 사무실 앞에서 그를 내 품 안에 안았을 때, 가슴 두근거리던 그 설렘과 기쁨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뭉클함이 있었다. 그의 당황하던 시선과 빨개진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던 그때, 이렇게 그와 결별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 그런 것을 예측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잘 맞았고 서로에 대해 깊은 호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내가 첫 연애 상대였기에 그는 나름대로 꿈꾸던 연애의 로망이란 게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해 보고 싶은 것들, 함께 가 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워낙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고, 정확하게 눈에 보이는 것을 선호하던 그는 목차를 정해서 나에게 보여줬다.


소위 그의 연애 버킷리스트는 이랬다. 남산 타워, 63 빌딩, 수족관, 동물원, 전시회 등 가 보기. 고향이 포항이었고 포항과 대구에서만 살아왔던 그는 서울에 정착한 뒤로 서울의 명소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연인들끼리 자주 가는 데이트 코스라든가, 맛집 가는 것을 즐겼다. 또, 그는 쇼핑하는 것을 좋아해서 서울의 큰 쇼핑센터에 가서 한 바퀴 둘러보고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전까지 심심한 연애, 즉 영화관, 노래방, 카페, 술집 외에는 별로 가 본 적이 없던 게을러빠진 나로서는 그와의 연애가 뭔가 도전해야 할 과제로 여겨서 처음에는 적잖게 부담이 되었다. 남자끼리 무슨 쇼핑이니, 데이트 코스니 닭살 돋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나의 냉소적인 반응에 티를 내려하지 않았지만, 실망하는 티가 많이 겉으로 드러났다. 결국 나는 그의 연애 계획을 따라 함께 서울의 이곳저곳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가까이는 내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부터 먼 곳은 그가 다니던 대학원까지. 수도권과 서울의 이모저모를 돌아다니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느끼면서 행복한 시간을 나름 보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와 연애 버킷리스트를 계획하고 데이트를 즐겼던 것이 내 연애뿐만 아니라, 내 인생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에게 감사하고 있으나, 이 부분에서만큼은 특별히 더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다.


그와 가장 자주 갔던 곳은 내 모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작은 우동 가게였다. 히카리라는 간판을 단 그 가게에 가서 냉우동세트를 자주 시켜먹었던 우리는 매번 갈 때마다 전체적으로 정겹고 익숙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시간이 덧입혀지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소소한 것들-매번 달라지는 그와의 대화 주제-이 생겨 즐겁고 행복했다. 이제는 그와 냉우동세트를 먹으러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먹는 냉우동세트는 그때만큼 맛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쇼핑센터 가는 것을 특히나 좋아했는데, 거대한 쇼핑센터 안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유명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를 즐겼다. 우리 집과 가까운 김포공항의 롯데몰은 우리가 가장 많이 간 쇼핑센터일 것이다. 나는 쇼핑센터의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어 있다가 수많은 인파들에 눈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나는 프랜차이즈의 음식이 입에 맞질 않았지만, 그는 유명한 맛집이라며 먹어보자고 재촉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그렇게 쇼핑센터에 가는 것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가지 않고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맞춰주고 함께 즐겼다면 어땠을까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는 연애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실행하면서 자신의 꿈을 그것에 투영하려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면서 행복한 결말을 꿈꿨던 것 같았다. 마치 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끝을 맺는 것처럼. 그렇지만 우리는 연애 버킷리스트를 다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헤어졌다. 그는 자신의 연애가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해 못내 아쉽고 속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우리의 추억을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한동안, 아니 지금도 아파하고 있다.


나도 그와의 이별이 가슴 저리게 아프다. 가끔씩 그의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가 부른 노래, 그가 좋아하던 음식, 그가 잘해주던 요리, 그의 말버릇, 그의 별명 등이 머릿속에 아직도 가득 차 있는데, 그를 어떻게 금방 잊을 수 있을까. 아마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우리의 관계를 정립하고 해결해 주리라 생각한다.


나의 특별했던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과의 연애가 정말 행복했었다고. 못해준 것이 너무 많아서 미안하고,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고맙다고. 당신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거라고. 당신은 어느 곳에서든지 사랑받을 충분한 자격을 지녔다고. 고마웠어요. 그리고 미안했어요. 행복하세요. 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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