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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Dec 19. 2021

엄마의 하느님, 나의 부처님

모녀의 종교 갈등과 화해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길거리와 상점들은 온갖 크리스마스 장식과 소품들로 가득했다. 나는 일 년 중 크리스마스를 가장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석가탄신일도 의미가 있기로는 매한가지인데, 연말에 맞이하는 성탄절은 대대적으로 홍보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또 싫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엄마가 어느 때보다도 좋아하는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천주교를 깊이 맹신했었다. 천주교의 모든 행사에 참례하는 엄마는 성실한 신자였지만, 집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밖에서는 기품 있고 교양 있던 엄마는 다른 신자들의 눈에 잘 보일 생각만 하고 집안일은 거의 돌보지 않았다. 어린 나는 외할머니의 손에 맡겨져 커야 했고 매일 성당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외할머니를 붙잡고 엄마를 부르며 울어댔다. 그러나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매무새를 고쳐 매고는 쌩하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그렇게 엄마의 정을 느낄 사이도 없이 머리가 자라 어느덧 생각이란 걸 하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이제 엄마가 밉고도 미워져서 엄마가 하는 것에 반대로 행동하는 청개구리 사춘기 소녀가 되어 있었다. 물론 엄마는 내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는 그 무관심이 더욱 신경이 쓰여 내 뜻대로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외할머니가 중간에서 중재 역할을 해주시기는 했지만, 엄마와 나의 사이는 얼어붙은 강처럼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근처 절의 한 스님께서 쌀을 얻기 위해 우리 집에 방문하셨다.


  "쌀 좀 시주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스님을 보자마자 뭔가에 홀린 듯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외할머니가 스님에게 쌀을 시주하자, 스님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리고 자리를 떠나셨다. 나는 스님이 가시고도 한동안 자리에 머물러 스님이 중얼거린 주문 같은 말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그때 내 머릿속에 이거다 하면서 섬광처럼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절이었다. 절에 가서 엄마에게 복수를 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은 나는 그날부터 매일같이 그 스님이 계신 절로 가서 스님의 독경 소리를 들으며 절을 올렸다.


  내가 절에 다닌다는 얘기는 외할머니를 통해 엄마에게 전해졌다. 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붙잡고 엄포를 놓았다.


  "당장에 그놈의 절 그만 다녀!"


  나는 나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엄마가 반가우면서도 반대로 절에 다닌다고 하니, 그제야 관심을 보이는 엄마가 미워졌다.


  "엄마가 뭔데 절에 다니라 마라야? 나도 내 자유가 있어!"


  나는 방문을 거칠게 닫아걸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방 밖에서 "다니지 말라고 했어!"라고 소리친 뒤로 조용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절에서 받은 반야심경을 꺼내 최대한 큰 소리로 읊었다. 문 밖에서 엄마가 들으라는 식으로 말이다.


  "마하반야 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내 예상대로 엄마는 문을 세게 두드리면서 "그놈의 주문 그만 못 외워?" 하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그런 엄마의 반응에 힘이 더 솟구쳐서 1시간을 그렇게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그날부터 엄마와 나의 사이는 살얼음판처럼 건드리면 갈라질 듯 아슬아슬한 관계가 되었다.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갔고, 나는 그런 엄마에게 저항하기 위해 더 신실하게 절을 찾았다.


  하루는 절을 찾아가서 불상에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예전 쌀을 얻으러 왔던 스님이 내게 다가와 대화를 청했다. 나는 스님을 따라 스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따뜻한 차를 꺼내 내게 대접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보살님은 무슨 고민이 있어 이곳에 자주 오십니까?"

  "저는 딱히 고민이 없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인데요."

  "아니,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답니다. 그러니, 고민을 털어놔도 돼요."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엄마와의 갈등에 대해서 얘기를 꺼냈다. 어렸을 때부터 종교에 빠져 자식에게 무관심했던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리고 요즘 불교를 믿게 되면서 엄마와의 갈등이 더 심해졌다는 것도 말했다. 스님은 한동안 내 얘기를 잠자코 듣더니, 다시 온화한 미소를 보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디 뿌리와 잎새는 한 나무의 일부분이지요. 뿌리가 먼저 나왔다고 해서 뿌리만 중요한 것도, 잎새가 나중에 나왔다 해서 잎새만 소중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의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뿌리도, 잎새도 필요한 것입니다. 뿌리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스님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 마디 하고서는 그 뒤로는 차를 마시며 말이 없었다. 나는 스님의 방을 나와 절을 나서면서 스님의 말씀을 곱씹어 보았지만, 도무지 스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저녁이 되어 외할머니와 함께 밥상에 앉았다.


  "네 엄마는 오늘 대림 주일인가 그거 미사 드리러 갔다. 오늘은 우리 둘이서 먹자."


  외할머니는 계란 프라이를 프라이팬에서 접시로 옮기면서 말했다. 나는 외할머니의 말에 그저 말없이 시큰둥하게 있다가 젓가락을 계란 프라이를 집었다.


  "네가 어렸을 때 말여. 네 아빠도 일찍 세상 떠나고 네 엄마 혼자서 널 키워야 했단 말여. 그런데 어느 날, 네 엄마가 일하고 있는데, 네가 열이 40도 넘게 올라가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뭐여. 내가 널 업고 응급실에 데려갔지만, 열이 떨어지질 않아서 온몸을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별 짓을 다 했지. 그런데 옆에 있던 환자 엄마가 천주교 신자였던 게지. 그 사람이 네가 아파하는 게 안타까웠는지 네 손을 붙잡고 예수님한티 기도를 드렸다는 거 아니여. 그랬는데 조금씩 네 열이 내려가더라. 신기했지. 네 엄마는 그걸 다 지켜봤재. 그래서 네 엄마가 지금껏 성당에 빠지지 않고 가는 것이여. 매일 너 건강하라고, 너 잘되라고 예수님하고 성모님한티 기도드리는 거라니께."


  순간, 계란 프라이를 신경질적으로 우적우적 씹고 있던 내 턱이 운동을 멈췄다. 뭔가 마음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그동안 자주 느껴왔던 분노라는 감정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 뜨겁고 뭉클거리는 것은 내 얼굴과 목을 뜨겁게 하고 이내 눈가를 붉히게 만들었다. 몰랐다. 그저 정 없고 무뚝뚝하고 무관심하고 날카롭고 예민하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실체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엄마는 종교에 맹목적으로 빠져 있는 게 아니라, 실은 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있었구나. 엄마의 관심의 나침반은 언제나 나를 향해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이내 한이 맺혀 있던 가슴에서 토해내듯 목에서 꺽꺽거리며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엄마, 엄마..."


  외할머니는 내 등을 어루만지며 "내 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외할머니의 품에 안겼다. 그렇게 안겨서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왔다.


  "오늘은 미사가 조금 일찍 끝났네. 너 왜 그러니?"


  엄마는 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자, 겁에 질린 사람처럼 당황했다.


  "엄마, 미안해요..."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엄마는 당황스러워하는 듯하더니, 이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꼭 안아줬다. 나는 엄마의 품 안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나는 엄마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엄마한테 복수한다고 절에 간다고 했어요. 죄송해요."


  "아니야... 엄마가 미안하다. 표현도 하지 않고, 너를 너무 외롭게 했어. 절에 가는 건 엄마도 좋다고 생각해."


  "정말요?"


  "오늘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했거든. 신부님께서 자식의 종교도 다를 뿐,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어. 엄마도 신부님의 말씀에 따르려고. 엄마가 그동안 네 마음을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그러면 이제 엄마는 하느님을, 저는 부처님을 믿어도 서로 싸우지 않는 거죠?"


  "그럼."


  나는 그날 엄마와 한 침대에서 함께 자면서 그동안 나누지 못한 모녀간의 친밀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서로의 종교에 대해서도 배워 가기로 약속했다. 엄마의 하느님에게서도, 나의 부처님에게서도 서로 배울 점은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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