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
TOP 여배우의 갑작스러운 은둔, 그 원인은?
K는 한국에서 그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30대 후반의 여배우였다. K는 한국의 오드리 햅번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 비율 좋은 몸매를 가진 모든 여성들의 워너비였고, 남성들의 이상형 TOP 3 안에 들기도 했다. K가 출연하는 드라마는 항상 시청률 고공 행진을 했고, 그녀가 나오는 광고는 언제나 완판이 되었다. K가 나오는 영화는 티켓이 불티나게 팔렸고, 그녀는 이미 천만 관객 티켓파워를 가진 대배우였다. K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각종 상들을 휩쓸었고, 그런 그녀의 전성기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K가 TV 브라운관에서, 영화계에서, 광고시장에서 종적을 감추고 은둔하기 시작했다. 각종 연예신문기사에서는 K의 은둔 생활을 캐내려 특집 기사를 내면서까지 그녀의 행적을 쫓았지만, 감쪽같이 숨어버린 그녀를 발견하기란 좀처럼 어려웠다. 한 용감하고 끈기 있는 기자가 K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특종을 터뜨리기 위해 한 달간 그녀의 집 앞에서 잠복을 시도했는데, 한 달 뒤 그 기자가 신문사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한 얘기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K는 한 번도 집 밖으로 나온 적이 없어."
"에이, 헛수고했구먼."
동료 기자들은 팔짱을 끼고 그를 향해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런데 매일 저녁 8시가 되면 집 안으로 빨간색 포르셰가 차고로 들어와."
"그래서?"
"그러고선 딱 4시간 뒤인 자정에 빨간색 포르셰가 집 밖으로 나가더라고."
"그래서? 그 차를 쫓아가 봤어?"
"물론 쫓아가 봤지. 그런데 차주가 누가 쫓아온다는 걸 아는 건지 내 차를 따돌리려고 매번 다른 방향으로 가더라고."
"K가 남자 친구가 있는 거 아니야? 연애하고 있어서 작품 활동이 없었던 거고."
"그것까진 모르겠어. 하지만 누가 K의 집을 방문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이거 특종으로 내자. 부장님께 말씀드릴 테니까. 'K양 숨겨진 연인 있어' 어때?"
"아무래도 나는 좀 더 알아봐야겠어. 내 촉에는 연인 같지는 않은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럼 내가 그 특종 가져간다. 일단 기사부터 올려서 터뜨려야지."
그 다음날 아침, 동료 기자에 의해서 K의 열애설 특집 기사가 대대적으로 신문에 실려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K의 기획사에서는 아침부터 전화통에 불이 나서 전부 정신이 없었다. 정 대표부터 인턴까지 온 직원이 K의 열애설을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아, 예. 국장님. 아, 아니에요. 사실이 아니죠. P 신문사에서 악의적으로 퍼뜨린 루머예요. K양이 그럴 리가 있나요, 어디. 그간 쌓아놓은 이미지도 있는데, 말이 안 되죠. 예, 예.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도 법무팀에 대응하라고 지시해 뒀어요. 예, 예.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국장님. 예, 예. 들어가세요."
정 대표는 K 방송사 드라마국 국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끊자마자 소리를 내질렀다.
"박 실장! 박 실장! 어딨어?"
머리가 곱슬인 한 남자가 이마에 한 가득 땀을 흘리며 대표실로 들어왔다.
"예, 대표님."
정 대표는 탁자 밑에 있는 쓰레기통을 박 실장에게 있는 힘껏 던졌다. 박 실장은 그 쓰레기통을 이마에 맞고 잠시 휘청거렸다.
"박 실장, 너 일 제대로 안 할래? K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대표님..."
"걔 K는 도대체 뭐라고 하디?"
"묵묵부답입니다. 할 말이 없답니다."
"도대체 왜? 진짜 남자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랍니다."
"그럼 임신이라도 한 거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간 넌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어. K한테 가서 4시간 동안 뭐 하고 있었는지 알아 와."
"예, 알겠습니다. 대표님."
박 실장은 뒤에서 "못 알아오면 너 사표 낼 각오해!"하고 일갈하는 정 대표에게 굽신거리면서 대표실을 나섰다. 박 실장은 K와 가깝게 지내는 코디네이터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매니저 등을 불렀다.
"너희는 뭐 좀 아는 거 없냐?"
"아뇨... 저희도 잘..."
그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자신 없는 듯 손을 반쯤 올렸다.
"어, 오수지. 말해 봐."
"실은... 의상이나 메이크업할 때도 언니가 저녁 8시만 되면 저희를 집 밖으로 쫓아내서 저희도 어리둥절할 때가 많아요. 그 시간만 되면 뭐 씐 사람처럼 짜증을 막 내면서 저희더러 빨리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는 저녁 8시 이후에는 언니 집에 있던 적이 없어요..."
"장 팀장, 오수지 말이 맞아?"
"네..."
박 실장은 자신이 직접 K를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K의 신인 시절부터 함께 한 박 실장이었다. K의 로드 매니저에서부터 시작해 지금 실장의 자리에 오른 박 실장은 그녀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었다. K의 성격,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징크스까지... 그런데 요즘 K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도대체 그 4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박 실장의 차가 K의 집 앞에서 멈춰 섰다. K의 집은 청담동에 위치해 있었는데, 한 프랑스 건축가가 디자인한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저택이 그녀의 이미지와 잘 맞았다. K도 이 집에 대해서 애착을 많이 가졌다. 특히 K는 이 집의 담장이 높은 것을 좋아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박 실장은 K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나야, 박 실장."
"들어와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박 실장은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들어섰다. 정원에는 반듯하게 깎아놓은 잔디와 나무들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금테로 장식된 저택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넓은 거실이 눈 안에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햇살이 한가득 거실 안으로 들어왔을 텐데, 불을 다 꺼놔서 거실은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칙칙했다. 그 거실 소파에 K가 상체를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박 실장은 K를 발견하고 옆 소파에 앉으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K야."
"몰라, 오빠. 나한테 묻지 마. 난 할 말 없어..."
"K야... 지금 바깥은 난리가 났어. 네가 사실을 말해줘야 해결이 된다고..."
"그래도 난 말 못 해. 여배우 자존심이 있지..."
"뭔데 그래. 오빠한테만 얘기해 봐. 우리 10년 넘게 함께 했잖아..."
박 실장이 K의 어깨에 자신의 두툼한 손을 갖다 대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박 실장을 바라봤다. K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오빠, 나 이제 어떡해..."
K가 박 실장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박 실장은 K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잠시 주춤했지만, 동생을 어루만지듯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박 실장은 최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K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나 이제 연기가 안 돼... 감정이 잡히질 않아. 감정을 잡는 법을 모르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이런 상태가 된 지는 1년 좀 넘었어. 예전에는 감정을 캐치해서 연기를 잘 해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감정이 안 느껴져. 모든 게 밋밋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져.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연기하기가 겁이 났어. 겁이 나고 또 겁이 나서 대중들 앞에 나서기가 겁났어...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심리상담으로 유명하신 오 박사님께 연락을 드려서 방문진료를 해달라고 했어. 흔쾌히 수락해 주셨고, 그때부터 매일 심리치유 상담팀을 데리고 오후 8시에 오시는 거야..."
그렇게 연기를 잘하던 한국의 오드리 햅번 K가, 드라마, 영화, 광고, 예능 할 것 없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녀가 갑자기 감정을 잃어버렸다고?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 실장은 K의 말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얼얼했다.
"가만... 가만... 그러면 매일 4시간 동안 심리상담을 받고 있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연기 치료도 받고 있었어..."
"연기 치료? 그건 뭐야?"
"내가 감정 연기가 안 되니까... 연기 선생님을 모셔와서 감정 잡는 법을 배우고 있어. 그런데 좀처럼 진척이 없어..."
박 실장은 망연자실해하고 있는 K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이게 현실인가 싶었다. 그래도 이게 현실이 아닐 거라는 작은 희망을 걸고 K에게 말했다.
"K야, 여기서 한 번 연기해 봐. 네가 잘하던 로코 여주인공 연기 있잖아. 그거 해 봐."
"오빠, 이러지 마... 나 진짜 연기가 안 돼..."
"아냐, 내가 한 번 봐야겠어. 어떤지. 그러니까 한 번 해 봐."
K는 민망한 듯 쭈뼛거리며 연기를 시작했다.
"오빠, 당신은 나의 전부예요. 날 떠나지 말아요."
박 실장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K는 마치 국어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말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간절한 감정이 느껴져야 하는데, 감정은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감정이 아닌 사실을 전달하는 앵커의 목소리처럼 날카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정말 감정을 잃어버린 게 확실한 듯 보였다. 박 실장은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오 박사님은 뭐라셔? 왜 갑자기 감정을 잃어버린 건지 알아내셨어?"
"아니... 오 박사님도 나 같은 케이스는 처음 본다고 하시면서 곤혹스러워하시더라고."
"아아... 이럴 수가..."
박 실장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박 실장은 그 소리를 듣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정 대표였다. 박 실장은 K를 슬며시 쳐다봤다. K는 목에 손을 그어 말하면 죽는다고 표현했다.
"예, 대표님..."
"어떻게 됐어? K가 왜 그런 거래?"
"그게... 실은......"
옆을 쳐다보니, K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니, 또 마음이 약해지는 박 실장이었다.
"그게 실은... 마사지 선생님이었더라고요. 알고 보니, 매일 저녁 8시마다 마사지를 받고 있었어요. 따로 마사지샵에 갈 여건이 안 됐었나 봐요."
"그래? 진짜야?"
"예, 진짭니다. 본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따가 마사지 선생님도 만나보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예, 들어가십시오. 대표님."
정 대표와의 전화가 끝나자, 박 실장은 무너지듯 소파에 털썩 내려앉았다. 박 실장은 다시 웅크리고 있는 K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평생 이러고 있을 건 아니잖아. 활동도 해야 하는데..."
"연기가 돼야 활동을 하지... 여배우로서는 이제 끝이야......"
K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박 실장은 K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제 어떡하냐... 갑자기 연기가 잘 되기를 바랄 수도 없고... 이제 연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 되어 버렸네..."
박 실장은 공허한 거실의 공기만큼 가슴이 답답해져 오기 시작했다. 이제 이 일을 어찌할꼬,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