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런 글귀를 보았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선물을 줄 때 고통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준다. 고통의 포장지를 풀어 본 사람만이 신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아~ 하고 무릎을 치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얘기야. 차라리 선물 안 받을래’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안타까운 것은 내가 선물을 받고 싶다고 받고, 안 받고 싶다고 안받는 구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그 고통의 포장지를 풀어 보던 아니던 우리 앞에서 역경이 놓여있고 그것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만이 존재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감히 오묘하고도 복잡하게 설계된 인생을 딱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알겠다는 오만이 올라오는 순간 가차 없이 눌러버리는 잔인함도 맛보고 소심하게 주춤거리면 용기내어 걸어 나오라는 달콤한 사탕을 받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 젊은 나이에 암 투병으로 생명이 꺼지고 있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분은 그 아내와 가까운 지인인지라 감정이입으로 목이 메이고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리는 상황이었구요.
그때 그분이 그랬습니다.
“영희님, 과연 저 부부에게도 아픔이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겠죠. 잔인함이겠죠.”
“그러니까요. 저는 신이 주는 선물 같은 거 안 받고 싶어요.”
저도 백번, 천번 공감 되었습니다. 실제 그런 생각을 많이 한 시간도 있었구요.
그런데 엄마가 뇌졸중으로 재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내가 겪고 싶다고 겪고, 거부하고 싶다고 거부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2019년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저는 매일 병원을 갔습니다.
그곳의 많은 환자들 중 두 사람이 기억납니다.
한 명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하반신 마비가 되고 언어기능도 상실된 30대의 어린 새댁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교통사고로 모든 인지기능과 운동기능을 잃어버린 21살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분명 그 병원에는 수 많은 환자들이 차고 넘쳤지만 유독 그 두 명이 기억이 남는 것은 내 기준으로 너무도 안타까운 사연들이라고 느꼈기 때문일겁니다.
어느날 병원 복도 한쪽 휴대폰에서 어린아이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약 4-5살 되는 아이였습니다. 할머니가 아이를 돌보고 있었고 너무도 뽀얗게 잘생긴 아빠가 아이에게 영상통화로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ㅇㅇ아 안녕. 할머니 말 잘 듣고 있어? 아빠 엄마 병원 왔어. 엄마하고 인사해.”
그러자 휠체어에 앉아 있던 젊은 새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딸에게 열심히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뭐라고 발음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입니다.
전화기 속 아이는 그런 엄마에게 관심이 없는 듯 보고 있던 텔레비전 만화에 더욱 몰두하고 있었구요.
그 장면을 바라보던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21살 어린 소년은 재활실에서 만났습니다. 대부분 환자의 재활은 걷고 일어서는 것이 중심이었지만 이 친구는 스마트 패드를 작동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있었습니다.
언어기능이 잘 안되는 이 친구를 위해 대화의 수단으로 패드를 활용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휠체어에 앉아서 스마트 패드를 다루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게임하는 십대 아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자신과의 엄청난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시절 제게는 고3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어찌 아리지 않겠습니까?
그날부터 마음에 알 수 없는 감사와 세상에 대한 겸손이 자리 잡았습니다.
나는 살면서 저런 불행은 절대 겪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발급받은 적이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누구나 만날 수 있지만 누구나 만나고 싶지 않은 불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시간만 피하고 살아도 우리는 정말 감사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며 만나는 작고 아픈 시간들은 어쩜 또 다른 축복일수 있습니다.
아기들은 원래 아프면서 큽니다. 그 과정에서 면역을 기르게 되는거구요.
우리도 아픈 만큼 성숙합니다. 아프지 않고 성숙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우리에게 아직 부족한 삶의 면역이 많습니다. 사람이 아예 안 아프고 클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삶이 주는 망연자실한 아픔은 어쩔 수 없지만, 내게 주어진 아픔들을 다정히 품어보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남편이, 아이가, 또는 돈이나 직장이 주는 아픔이 있으신가요?
모두가 우리를 키우기 위한 선물입니다.
선물은 기쁜 마음으로 풀어보는 설레임이 있어야 맛입니다.
그러니 호흡 한번 크게 하고 입꼬리 한 번 올리고 우리 눈앞에 있는 선물에게 손 내밀어 봅시다.
“그래, 이번에는 얼마나 또 나를 키우시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