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출근시간, 오늘따라 왼쪽 새끼 발 가락이 더 조여 드는 통에 급히 옮기는 발걸음이 영 자유롭지 못합니다. 엉성하게 절뚝이며 한발 한발 내 딛을 때 마다 인간이 타고난 통감의 감각들이 깊이 전달됩니다.
새로 산 스니커즈가 탄생의 뻑뻑함을 전혀 내려놓지 않아 걷을 때 마다 가죽의 도도함에 발목이 시큰거려 옵니다. 신발의 볼은 발가락을 쪼이고 신발의 테두리는 발목 주변을 누릅니다. 그러니 걸음이 자연스레 불편해 집니다.
원래 신발이란 새로운 인연을 만날 때 주인과의 적응시간이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신발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본연의 재질이 가진 특성을 구부리고 눌려지고 그 성격이 부드러워지는데 그 시간동안 주인의 발 주변은 저림과 마찰에 의한 피부상처로 여간 고달픈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닙니다.
하얀 가죽과 고무줄 신발 끈 위로 너무도 선명한 주황색 체크무늬 스티치가 지나가는 스니커즈 한 켤레를 샀습니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도 산뜻함을 뽐내며 저를 손짓하던 놈입니다. 외적인 예쁨에 꽂혀 다른 것은 미처 생각하지도 않고 값을 치루고 집으로 안고 왔습니다.
세상 제일 촌스런 엄마인 내게 그 운동화는 딸을 위한 하나의 선물이었습니다. 매번 새까맣고 늘어진 운동화를 끈도 제대로 묶지 않고 팔딱거리며 다니는 22살 딸이 너무 안타까웠던 겁니다. 보통 신발보다 유독 도도한 운동화이다 보니 영혼이 자유로운 딸은 새로운 신발과의 불편한 동거를 쉽게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매번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하얀 스니커즈가 제 눈에 너무나 안타깝게 들어왔습니다.
그래 마음을 크게 먹었습니다. ‘저 신발 내가 인연 맺어 편하게 만들어서 보내자’
그렇게 저는 하얀 스니커즈를 매일 출근길에 신고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첫날은 만만찮게 조여 드는 신발에 집에 돌아오니 피로도가 몇 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꾸벅이며 영화를 보고 있는 남편이 눈에 들어옵니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남편에게 말합니다.
“여보야, 부탁이 있다. 다 딸을 위한 거니까 들어줘야해” “뭔데?”
“저기 하얀 스니커즈 보이지? 저 신발 5분만 신고 있어주라. 늘어져야 하는데 내 발 사이즈로는 좀 어렵네. 당신은 나보다 발이 크니까 빨리 늘어 날 거잖아”
남편은 천진한 아이마냥 성큼 성큼 걸어가 아기신발 같은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더니 복도식 아파트를 쭉~ 걸어갔다 돌아오기를 하는 묘기를 보여줍니다.
“어머, 어머~ 당신 최고야, 여보야 넘 고마워~ ㅋ”
그렇게 2주가 지난 월요일 아침, 신발에 닿는 발의 감각이 다릅니다.
‘아! 되었다. 이제 보내도 되겠다.’
휴가를 내고 봄나들이를 가기로 한 시간 딸에게 신발을 다시 건네었습니다.
“ㅇ아, 이제 이 신발 엄청 편해. 신어봐. 네 오늘 핑크색 레이스 치마와 잘 어울릴거야.”
“와~ 신기하다. 진짜 편해. 설마 했는데 이걸 이렇게 하는구나.... 엄마는 진짜 내가 좋구나...”
신발이 편해졌다며 신기해하는 딸을 보며 ‘참 내가 별난 엄마다’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남들이 보면 ‘참 저 아줌마 별종이다’ 하겠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별스러움이 워킹 맘으로 살아온 지난 20년 세월에서 나와 아이들을 지켜 주었습니다.
그런 한줄기 기둥이 없었다면 분명 지금보다 연약한 모습에 동동거리고 있었을 겁니다.
나 자신도 아이들도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도 시간적 제약이 있고 아이들의 육아에도 시간적 제약이 있었습니다. 한쪽을 포기하면 분명 나중에 후회할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직도 제 컴퓨터 속 폴더에는 아이들이 유치원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이벤트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 그중 한 자료를 보고 ‘피식’웃었습니다.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대표로 독서 골든벨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울산시내 모든 초등학교 아이들이 참가하는 그 대회를 위해 읽어야 하는 책이 13권 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모두 읽고 아이가 인지하기 좋도록 예상 질의 답변서를 한글파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파일을 보며 또 그랬습니다. ‘와~ 나 이때 이런 짓도 했구나.’
누군가는 참 이상하다 욕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와~ 대단한 엄마다 칭찬하기도 했지만 무엇이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열정과 별스러움의 경계에서 늘 춤췄던 덕분에 아이들은 제자리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잘 간직하며 자라 주었습니다.
어차피 개인적 삶에 대한 평가는 본인의 판단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많이 부족하더라도 제 스스로는 잘했다 쓰다듬어 주려고 합니다.
더 잘 할 수 있었지만 지금도 훌륭하다고. 그것으로 잃은 것도 있지만 결국 또 얻은 것도 있다고. 그러니 너무 기죽지 말고 또 당당히 나아가라고
당장 봄나들이 길에 꽃길을 한참 걸었지만 아이는 마냥 즐겁게 뛰어다닙니다. 그것으로 된 겁니다. 내가 맺어준 억지 인연이지만 분명 스니커즈는 딸과 편안한 한 부분이 된 겁니다.
에머슨이 그랬습니다.
‘나로 인해 세상에 단 한사람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수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인생이다’
다소 억지스럽게 성공한 인생을 논하는 마음에 소곤소곤 소리가 들립니다.
‘잘했어. 잘한 거야.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