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학생 내담자에 대한 상담이 있었습니다.
일전에 한번 말한적이 있는 친구인데 어릴 때 엄마의 학대와 학교폭력 등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 그러다 보니 늘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대화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자신이 중심이 아니고 타인의 기분을 맞추느라 너무도 피곤한 현실에 우울과 무기력으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타인의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시작된 상담은 현재 8회기를 맞이하며 많은 변화를 맞이하였습니다.
끝없는 노력 중에 얼마전 타인이 아닌 나에 대해 온전히 고민할 수 있는 유레카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시간의 짜릿함과 영감이 너무 컸던 탓에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습관이란게 너무나 무서운 놈입니다.
틈만 나면 나태하고 부정적인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려고 하고 실제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약 3주 만에 만났습니다.
1주는 내담자의 사정이 생겨 못 만나고 다음 1주는 제가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어려웠고 그렇게 3주 차에 상담을 한 것입니다.
그 사이 물리적인 공백이 발생하다 보니 긴장이 내려갔고 일상생활의 무력함도 올라왔습니다.
3주전 우리가 약속하기로는 정상적인 일상생활 패턴과 전공 공부를 실행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새벽에 잠들고 늦은 시간에 일어나고 사람들 만나 술 먹고 하는 생활의 연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중간 중간 책도 읽고 헬스클럽도 등록하고 사람들과의 모임도 줄였더니 나를 잡아먹는 기분은 상당히 줄어들어 그나마 견딜 만한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다시는 옛날의 그 비참한 기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얼마전 맛 보았던 그 짜릿한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요.”
“ㅇㅇ씨, 그렬려면 일상생활을 잘해야 해요. 지금 책 읽고 운동하는 것은 정말 잘하고 있어요. 과거와 다른 기분을 느꼈다고 했는데 차이점이 뭔지 찾아봅시다.”
“과거에는 타인이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거죠?”
“그게 나한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수용했어요.”
“맞아요. 타인의 언어를 곧 나라는 생각으로 비판 없이 인정했어요. 그건 단지 그의 말일뿐인데. 지금은 그걸 흘러가게 하고 있으니 타인의 이야기가 옛날만큼 신경 쓰이지 않는거에요.”
“그럼 저는 왜 타인의 이야기를 그렇게 안고 있었을까요?”
“어린 시절 큰 상처를 입었을 때 제대로 치료하고 위로받지 못하고 덮혀 버려서 그럴 확률이 높아요. 그 힘든 상황이 ㅇㅇ씨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 힘내라고 공감받고 회복하고 갔어야 했는데 그런 시간이 없었잖아요. 지금이라도 그걸 하자구요. 결국 자존감이 있어야 해요. 그렬려면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해요.”
우리 어린 내담자는 눈망울을 똘망 똘망 굴리며 잠시 말이 없습니다.
“궁금한게 있어요?”
“뭐에요?”
“선생님은 매일 일찍 일어나시고 해야 할 일을 하시잖아요. 어떤 마음으로 하세요? 어떻게 하기 싫을 때도 하세요?”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이었습니다.
잠시 생각을 해 봅니다.
“그건 ㅇㅇ씨가 처음 나하고 만났을 때 한 말하고 똑같은 이유에요? 혹시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세요?”
“.................”
“너무 잘살고 싶어서요. 너무 바보 같은 내가 싫고 그 힘든 감정이 싫어서요.”
과거 사소한 일상의 게으름에 패배해 임용고시가 떨어지고 무능한 백수로 집에 있을 때 첫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질 좋은 우유도 기저귀도 장난감도 교구도 모두 돈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그럴 돈이 없었습니다.
옆집 아이의 책을 빌려 읽고 마트에서 가격에 따라 무언가를 선택하는 그 시간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누군가 저더러 무능하다는 표현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습니다.
나의 내면적 세계와는 상관없이 그저 재단되고 나의 말이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헛소리로 치부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다 또 조금 개선된 상황에 그 서러움은 쉽게 까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살며 내자신보다 더 소중한 누군가를 지켜내야 하는데 힘이 없어 허덕이는 나를 만나고 또 좌절에 빠졌습니다.
한번은 모르지만 두 번, 세 번을 그러고 살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잘살고 싶다. 너무 소중한 내 인생, 정말 잘살고 싶다. 다시는 힘없는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
괴롭다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그 고통이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각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그때의 감정보다 힘들지는 않습니다.
겨울 새벽, 영하 9도의 날씨도 나의 피부를 따금거리게는 할지언정 나의 마음을 멈추게는 못합니다.
그러니 한 겹 더 입은 옷과 한 겹 더 두른 목도리로 달리기를 할 수 있는겁니다.
나에게 있어 지금 하기 싫은 것을 할 수 있는 힘은 그보다 더 끔찍한 현실을 만나기 싫다는 두려움입니다.
더불어 정말 잘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눈물 나는 애착입니다.
과거의 경험으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 준비하지 않으면 나의 10년 후는 또 무료함과 망망대해를 떠도는 조각배 같은 존재가 될거라는 것을.
모든 사람의 성격이 다 같은 것이 아니니 자신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소한 나라는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하는것이 질색이고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존재감 없이 지내는 것을 못합니다.
특별한 사고사가 아니면 앞으로 40년 전후의 수명이 남았습니다.
그 시간을 과거와 같이 후회하고 울면서 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뭐 특별함은 없습니다. 과거의 슬픔이 내게 지금의 불편함보다 큰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결국 비법 같은 것은 없습니다. 무식하고도 과묵한 실천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ㅇㅇ씨 잘 들여다 봐. 정말 그때의 감정이 죽기보다 싫어요? 그럼 지금 힘들어야지. 그래야 나중에 그 죽음같은 감정을 안 만나는 거지. 결국 세상은 ㅇㅇ씨 자신에게 달린거에요.”
참 뻔한 얘기를 인생의 율법처럼 들려주는 제가 마땅찮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이상 찾아내지 못하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시작한 지 만 10년이 넘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100일이 넘으면 습관이 형성된다고 했나요?
저는 아직도 운동 나가기가 힘듭니다.
일단 오늘 날씨는 어떤가? 몸의 기운은 있나? 혹시 해야 할 일은 없나? 각종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운동을 성공하는 가장 쉬운 길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당연한 일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많은 생각을 담지 않는 겁니다.
당연히 해야 하니 하는 일로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겁니다.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어떻게 하냐구요?
“그냥이요. 이러니 저러니 하는 영악한 계산이 아닌 근성으로 그냥 하는 겁니다. 한 발 한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