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 여고생이랑 45살 아저씨가 사랑하는 얘기인가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by 윤철희

포스터에는

교복을 입은 앳돼 보이는 여고생 타치바나 아키라(코마츠 나나)와

살짝 젊어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중년 티가 나는 콘도 마사미(오오이즈미 요)가

위아래로 배치돼 있다.

영화 소개에 따르면

아키라는 18살 여고생이고 마사미는 45살 아저씨다.

포스터에 적혀 있는 영화 제목은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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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포스터에 실린 정보만 놓고 보면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인다.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건

불법적인 일은 아니지만

고운 눈으로 바라볼 사람을 찾기 힘든 일이기는 하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이 정도 정보만 알았을 때는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나가이 아키라(永井聡) 감독의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이렇게 누가 봐도 “불쾌한 영화”로 오해할만한 설정을 가진 영화다.

이 몇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중년 남성이 한참이나 어린,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여성에 대해 품은

음험한 (심하게는 변태적인?) 판타지를 담아낸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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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젊은 시절에 품었던 꿈을 잃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현실에 안주한 중년 남자와

성공가도를 질주하던 와중에

꿈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한 10대 여자가

우연한 계기로 서로에게 호감을 품게 되고

감정에 파란을 일으키는 여러 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에는 각자 품고 있던 꿈을

현실화하는 길에 다시 나서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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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 보면

“사랑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인가?

호감과 사랑을 가르는 경계선은 어디인가?”라는 궁금증을 품게 된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호감에서 시작된다.

기록을 갈아치우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는 육상선수인 아키라는

발목 인대 부상을 당하면서

선수 생활을 접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몰린다.

병원을 다녀온 후 우울한 기분으로 찾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콘도 점장이 베푼 따뜻한 응대에 반한 아키라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그곳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직한다.
콘도를 남몰래 흠모하는 아키라는

점장을 향한 자신의 감정은 “사랑”일 거라고 확신하고는

점장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건 “사랑”일까? “사랑”이 맞을까?

힘든 시기에 잠깐이나마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준,

불행한 현실을 잊게 해 준 아버지뻘 되는 남자에게 품은 “호감”을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건 아닐까?

“사랑”이라는 감정의 진짜 정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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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같은 제목의 만화가 원작인 영화지만,

여고생의 풋풋한 사랑을 근사하게 포장해 달달하게 보여주는

다른 만화 원작의 순정영화들과는 다른 영화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과

그리 깊은 고민 없이 원작만화를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놓은

다른 영화들 사이의 차이점은

이 영화가

“호감”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맹목적인 캐릭터들이

무턱대고 흐뭇한 사랑을 키워가는 식의 전개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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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아키라 때문에 잠시나마 흔들리지만,

문제의 “비 오는 밤”에는 더욱더 심하게 흔들리지만,

“호감”과 “사랑”은 확실히 다른 감정이라는 걸 잘 안다.

그는 아키라의 감정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고

아키라에게는 창창한 앞날이 있다는 걸 알 정도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사랑의 영역으로 넘어갈 경우

그들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거라는 걸 알 정도로

세상을 겪을 만큼 겪은 사람이다.

콘도는 아키라의 성화에 못 이겨 데이트에 나가지만

데이트의 단맛에 취해 허우적거리는 대신,

기억 저편에 묻어뒀던 꿈을 떠올리고는

그 꿈을 추구해 나갈 동기를 서서히 얻어간다.

그러면서 영화는 아키라가 육상선수라는 꿈을,

콘도가 소설가라는 꿈을 추구하는 경로로 오르는 과정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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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관객에게 흐뭇한 감동을 선사하겠답시고

두 사람이 그 꿈을 이루는 데 성공하는 걸 보여주는

클리셰로 흐르지 않는 것도 이 영화의 장점이다.

선수 생활을 접을 생각이었던 아키라는

육상화를 찾아 신지만 아직 트랙에 복귀한 것은 아니고,

레스토랑 직원이 콘도가 쓴 원고를 몰래 읽는 모습이 등장하지만

콘도가 소설가로 성공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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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장면에 다다른다.

영화의 결말을 장식하는 이 장면에서는 많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격한 감정이 실린 말은 오가지 않는다.

직장에서는 승진할 예정이지만

동경하던 소설의 영역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한 콘도는

차를 몰고 가다 워밍업을 위해 강변도로를 달리는

아키라와 육상부 선수들을 만나자 차를 세운다.

동료 선수들은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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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애초에 서있는 자리를 지킨 채로 서로를 본다.

영화는 두 사람을 한 화면으로 잡지 않는 것을 통해

두 사람은 하나로 합쳐지지 못할 각자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키라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우리는 친구죠?”라고 묻고

콘도는 웃는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문자를 주고받는 관계가 될 것이다.

세월이 지난 후에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할 가능성도 있겠지만,

영화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끝을 맺는다.


영화는 두 주인공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주인공들의 주위에 있는 캐릭터들도 꽤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방황하는 딸을 묵묵히 지켜보면서도 결코 방치하지는 않는 아키라의 어머니,

아키라를 걱정하는 친구 하루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으면서도

예전과 다르지 않은 태도로 옛 친구를 대하는 소설가,

적당히 못되게 굴지만 심성은 착한 요리사,

아키라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면서

아키라를 트랙에 복귀하게 만드는 자극제 역할을 하는 미즈키 등이

각자의 풍미를 내는 식재료로써 영화의 맛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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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아키라는 많은 광고를 연출한 경력을 가진 감독답게

눈에 잘 들어오고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비주얼을 연달아 보여준다.

세상이 온통 장밋빛으로 물 들었다는 듯 뽀샤시한 화면을 보여주는

순정영화 특유의 비주얼 대신,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보여주겠다는 듯

선명하고 산뜻한 화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필요할 경우에는 카메라를 적절히 움직이는 테크닉을 보여준다.


조금 유치해 보이는 테크닉이 없는 건 아니다.

만화가 원작이라는 걸 드러내듯 만화 스타일의 화면이 몇 번 나오는데,

특히 영화 도입부에서 아키라가 질주하는 장면을

만화 같은 비주얼로 연출한 건

뛰어난 육상선수인 아키라를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그러는 거라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듯한 연출이다.


이 영화를 앞서 소개한 “불쾌한 영화”로 오해하고 있는 분이

이 글을 읽었다면 영화를 직접 보고 그 오해를 풀었으면 한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매듭지어도 흐뭇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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