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더 월크 감독의 '크레센도'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은 꿈꾸는 미래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끊임없이 겪고 겨뤄야하는 현실이다. 특히 재능 있는 젊은 예술가들은 너무 일찍 미래를 만난다. 사람들은 그들이 순위가 매겨진 의자 위에 앉아도 될지 무대를 떠나야 할지 계속 평가한다. 경연대회, 입시, 시험을 거치면서 더 치열하게, 더 자주, 더 냉정하게 겪어야 하는 시간들 속에서 어쩌면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점수를, 자신의 순위를 가장 먼저 눈치 채는 건 예술가 본인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싸워야 하는 것이 동료 예술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삶은 더 뜨거워지고 치열해진다.
패자가 없는 경연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여하기 위해 세계 음악계의 유망주 30명이 모인다. 헤더 월크 감독의 카메라는 그들이 도착하는 순간부터 최종 우승자를 시상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을 촘촘하게 담는다. 인터뷰와 연주를 짜임새 있게 이으면서, 한 사람의 향기와 그들이 연주하는 색깔을 동시에 담아낸다.
30명의 피아니스트들이 모여 경연 방식을 전해 듣고, 201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인 선우예권이 추첨을 하면서 경연 순서가 정해지면 생존 경쟁이 시작된다. 임윤찬의 팬들은 ‘크레센도’가 그의 이야기를 많이 담아주길 바라겠지만, ‘크레센도’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참여한 많은 예술가들이 치열하게 동동거리는 모습을 다양한 관점에서 고르게 담아낸다.
‘크레센도’는 두 가지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하나는 현재 진행형인 증오에 의한 우크라이나_러시아 전쟁이다. 공교롭게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에 진행된 경연에서 러시아 참가자들은 연주를 중단해야하는 위기도 맞는다. 양국 참가자들은 경연 중 묘하게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는 후기도 있었지만 ‘크레센도’는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이슈에 깊게 들어가지는 않는다.
공교롭게도 결승에 참여한 피아니스트 중에서 은메달은 수상한 안나 게뉴시네는 러시아인이고 동메달을 수상한 드미트리 초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 솔직히 우정에 이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술가로서 각자의 재능과 스펙트럼을 존중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음악을 듣는 청중을 위해 최고의 연주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계속 강조해서 보여준다.
두 번째 질문은 예술에 순위를 매길 수 있을까, 예술이라는 것이 경연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음악 콩쿠르의 이야기를 담으면서 진짜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피로감을 느낄 만큼 많은 경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마지막 우승자를 가리는 과정, 우리는 그 결과를 이미 충분히 듣고 읽고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크레센도’ 속 경연은 우리가 아는 다른 경연들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우리는 TV 쇼에서 아쉽게 탈락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소위 ‘패자부활전’이라는 것을 벌이는 것을 쉽게 본다. 하지만 콩쿠르에서는 탈락한 다음, 다음 기회라는 것이 없다. 어쩌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연주자들을 ‘패자’라고 부르지 않는 그들의 정신 때문에 패자부활전이라는 것은 불가능한건지도 모르겠다. 예술 심의의 공정함을 믿고 경연의 결과보다는 예술의 영혼을 더 중요시하는 예술가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태도 덕분에 결과를 더욱 존중하게 되는데, 심지어 경건한 마음이 들 정도다.
다툼 없는 진짜 예술가의 마음
‘크레센도’는 2023년 제19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세계 최초 상영하면서 호평을 받았다. 이번에 극장 개봉한 다큐멘터리는 영화제 버전보다 15분 정도 길어진 감독판이다. 지휘자이자 콩쿠르의 심사위원장이자 최종 경연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참여했던 마린 일솝의 추천 영상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크레센도’는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 6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다큐멘터리이다. 1962년부터 클라이번의 고향인 텍사스에서 4년마다 개최되며 30세 이하 피아니스트만 참여가 가능하다. 젊은 예술가에게 기회를 주고, 더 많은 대중과 클래식을 공유하고자 하는 콩쿠르의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임윤찬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 이후에 임윤찬은 음악계의 주인공이 되었다.
제목 ‘크레센도’가 점점 더 크게라는 의미를 담은 것처럼 점점 고조되는 열정과 경쟁의 온도는 격정적이다. 인터뷰를 하는 느리고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와 달리, 무대 위에서는 어떤 머뭇거림도 없는 임윤찬을 보자면 진짜 예술가가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카메라 앞에서의 온도와 피아노를 연주하는 무대 위에서의 온도가 다른 진짜 예술가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은 황홀하면서도 냉정하고 냉정하면서도 뜨겁다. 그래서 어떨 때는 송곳에 찔린 것처럼 짜릿하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임윤찬이 우승에 이르는 과정에서 보여준 차분한 인터뷰와 그를 칭송하는 주위 사람들의 격앙된 반응, 그리고 지금의 임윤찬이 속한 세계를 열어주는 과정을 함께 하는 시간은 꽤 벅차다. 우승과 함께 어제와 확연하게 달라진 상황을 보여주지만, 임윤찬은 자신의 삶이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경쟁하지 않고 연주한다. 임윤찬은 관객과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던 선배 예술가들을 위해 연주한다고 말한다. 우승하려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의 끝에 우승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이다. 콩쿠르에 참여하는 다른 예술가들의 모습도 임윤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승이 아니라 연주할 기회를 더 간절하게 바라는, 연주를 통해 관객과 만나고, 연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연주자의 마음들. 어쩌면 우리가 예술가에게 바라는 진짜 마음, 진짜 예술의 마음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임윤찬에게 우승을 안겨주었고, 최종 파이널에 들었지만 수상하지 못한 다른 두 명의 참가자도 이 곡을 연주한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에 세 명의 연주를 교차로 들려준다. 같은 피아노곡이지만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 연주자의 현란한 몸짓과 몰입한 표정은 마치 스피드 경주를 보는 것 같은 짜릿한 속도감을 준다.
임윤찬이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라흐마니노프의 4개의 피아노 협주곡 중 기교 측면에서 가장 난해라고 연주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본인의 콘서트를 위해 자신의 현란한 기교를 보여주기 위한 곡이었기 때문에 라흐마니노프를 뛰어넘는 연주가 나오기 어렵다고 모두 연주를 꺼려했지만 1920년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이 곡의 연주를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더욱 유명한 곡이 되었다. 다큐멘터리에도 등장하지만 미국-러시아의 냉전 시대였던 1958년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미국인 반 클라이번에게 우승을 안겨주었던 곡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클라이번 콩쿠르 연주 채널] @TheCliburn
별도의 OST가 발매되지는 않았지만 콩쿠르에 참여한 우승자 임윤찬, 은메달을 수상한 안나 게뉴시네, 동메달을 수상한 드미트리 초니의 연주는 더 클라이번(The Cliburn) 유튜브 채널에서 편집 없이 모두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