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추석을 맞이하여 아버지 형제분들을 포함해서 대략 20여 명의 가족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우리 집안은 가부장적인 데에다 어른들은 모이기만 하면 싸워서 나는 가족들이 모이는 것을 싫어했다. 다행히 그날은 사소한 말다툼 없이 나름 오붓한 하루를 보냈다.
성묘 후에 중국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작은아버지께서 술을 한잔하시고는 기분이 좋으신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다.
“너는 집안의 장손인데, 우리 집안의 모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해 봐라”
나는 질문하는 사람의 의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답변했다. “집 안 분위기가 경직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가족 행사를 즐거운 분위기에서 치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작은아버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거리며 거친 목소리로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너는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우리 집 안이 경직되었다고? 너는 경직된 게 뭔지 알고 말하는 것이냐? 내가 경직이 뭔지 한 번 보여줄까?”
순간적으로 폭발한 작은 아버지의 분노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화가 나서 거칠게 쏘아붙이는 작은아버지의 비난을 그 자리에서 감당해야만 했다. 사실, 작은아버지는 늘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는 분이라 한 번도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솔직하게’ 말하라는 작은아버지의 말을 ‘어떤 말이라도 허용된다’라고 잘못 해석한 것 같다.
작은아버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너무 순진하게 대처한 나도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크게 야단칠 것이라면 ‘솔직하게 말해 봐라’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작은아버지는 “추석 때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성묘를 가고, 즐겁게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리 가족만큼 화목한 가족도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이후로, 나는 아버지 형제들에게 마음속에 있는 것을 투명하게 보여준 적이 없다. 솔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세상은 싫어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촌 동생들 또한 그날 이후로는, 어느 누구도 자기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집안의 장손도 말 한마디 잘못해서 저렇게 욕을 먹는데, 어딜 내가 감히…’라는 생각이 동생들에게도 깊게 자리 잡았을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아이를 이기지 말라’라는 개념을 보다 더 확장해서 설명하기 위함이다. 좀 전에 살펴본 것 같이 ‘아이를 이기지 말라’라고 말한 이유는 아이의 이기고 싶은 욕구를 존중하기 위해서, 아이가 이기는 것을 통해 놀이에 흥미를 붙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또한 아이가 이기는 것을 통해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단순히 말 그대로 놀이나 게임에서 아이에게 지는 것을 말한다. 물리적인 개념에서 볼 때 ‘아이를 이기지 말라’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실천하기가 어렵지 않다. 부모의 절제와 아이를 위해 배려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럼에도, 구체적인 실천법이 있다면 아무래도 일상에 적용하기 쉬울 것이다. 관련해서 ‘아이를 이기지 말라’의 구체적인 실천법을 든다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 번째로, 놀이의 주인공이 자녀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놀이를 하다 보면, 부모의 자아가 우선시 될 때가 있다. 축구경기 중에 아이의 공을 빼앗고, 화려한 드리블을 보여준다면 본인은 재미있을 줄 모르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다. 아이도 잘하고 싶은데, 실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축구에 대한 흥미는 반감된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재미있게 놀 수 있게, 다시 말해 아이가 놀이를 주도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 바로 부모의 역할이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놀이의 주인공은 자녀이다. 아이가 게임을 주도하며 재밌게 놀 때, 바로 그 놀이에 흥미를 붙이고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아이를 위하여 ‘놀이를 하고 있다’라는 것을 늘 떠올려서 어른 주도의 놀이가 되지 않도록 한다.
두 번째는, 놀이에 대한 승부욕을 내려놓는 것이다. 누구나 게임을 하면 이기고 싶다. 일방적인 게임이 되지 않도록 보조를 맞추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부모의 욕구가 아이의 욕구를 앞서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놀이에서 이길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한다. 놀이를 하다 보면 자녀의 놀이에 대한 설계를 엿볼 수 있다. 빨리 놀이를 끝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다든지, 아니면 오랫동안 같은 놀이를 반복하고 싶다든지. 부모의 헌신과 아이에 대한 관찰이 병행된다면 자녀는 놀이에서 즐거움 이상의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여기까지가 '아이를 이기지 말라'라는 것에 대한 물리적 개념이다. 반면에 '부모가 아이를 이기지 않도록' 정서적으로 지지해 주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용어에서부터 거부감이 생긴다. 왜냐하면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부모이지,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이기지 말라’라는 말의 숨은 의미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이기지 말라'라는 말은 결국, ‘아이가 부모를 이길 수 있게 하라’라는 말이다. 아이가 부모를 이길 수 있게 하라는 말을 분석해 보면 아이의 말이나 행동을 부정하지 말고, 가급적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아이는 말이나 행동을 깊게 생각하거나 통제하면서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이의 말이나 행동은 순간적으로 변한다. 그러면 이렇게 변덕이 심하고 주관적인 것들의 출발점은 어디일까? 나는 이들의 출발점이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아이를 이기지 말라'라는 말의 뜻은 ‘아이의 감정을 허락하라’는 말이 된다. 또 다른 말로는 ‘아이의 감정을 존중하라’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아이들의 감정은 수시로 변한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변덕을 부리기도,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런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고 보면 부모란 자신의 역량을 계속해서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 존재인 것 같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자녀는 부모의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 이런 과제를 제시해 주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세 살(24~36개월)이 되면 무엇이든 자기 멋대로 하고 싶어 한다. 부모가 해주려고 하는 것에 “싫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기존의 방식을 거부한다. 이 시기의 아이는 대단히 역동성이다. 자립심이 발달하여 자기만의 방법을 선택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언제 또 그랬냐는 듯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아이가 고집을 피워서 아이에게 맡겨두면 스스로 잘 해내지도 못한다.
이때를 제1 반항기라고 말한다. 서양에서도 이 시기의 아이를 ‘terrible two’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시기는 자아가 강력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아이 발달의 고유한 단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 시기에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안전과 주변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아이의 의견과 행동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아이에게 더 많은 주도권을 부여하고 아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야 한다. 아이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아이의 행동을 믿어주고, 기다려줘야 한다. 아이가 하는 말에 ‘그런 말 하면 못쓴다.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말을 하기 전에 한 번쯤은 호흡을 고를 필요가 있다.
아이가 스스로 일을 처리하려는데, 부모가 아이의 주도성을 인정하지 않고, 부모 뜻대로 일을 처리하면 아이는 무력감을 느낀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는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어차피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고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해 버린다. 그렇게 아이는 착한 아이로 양육될지 모르지만, 아이의 내면은 해결되지 않는 욕구로 분노가 쌓이게 된다.
아이들은 실수를 한다. 그것도 자주 한다. 아이의 실수는 예측이 불가능하고 순간적이기에 아이를 온전히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아이가 실수할 것 같아 부모가 아이 일을 대신해 주면, 당장에는 편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은 아이로 하여금 부모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해 준다.
부모가 자녀를 믿지 못하는데, 이 세상에 누가 이 아이를 믿을 것인가? 그렇게 자녀는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 부족한 사람 또는 모자라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아이의 의견이나 행동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아이의 말과 행동이 올바르거나 현명해서가 아니다. 비록 아이의 선택이 틀릴 수도 있지만,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직접 경험해 보며 세상을 배우기 때문이다. 아이의 표현이나 행동이, 비록 거칠고 잘못되었을지라도, 그조차 존중받아야 한다.
아이의 실수는 비난 대상이 아니다. 아이를 격려하고, 아이의 성공을 위해 부모가 도와주고, 이 사회가 함께할 때 아이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아이의 회복탄력성을 믿고 아이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격려하고 지지했으면 좋겠다.
결국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아이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이는 실수를 통해서 배운다. 아이를 위한답시고 부모들이 실수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독립된 한 개체로 성장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실수할 기회를 부여하고, 아이가 실수하더라도 지지해 주고, 아이가 주도적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더 늘여갈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