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귀가 아프게 들었던 ‘아비뇽 유수(幽囚)’의 바로 그 ‘아비뇽’이라서 일거다.
엑상프로방스나 고흐드(https://brunch.co.kr/@cielbleu/88 참조)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아비뇽은 기원전 121년 로마제국이 론(Rhone) 강을 끼고 이 곳에 도시를 세울 때부터 남북으로는 지중해에서 북유럽까지, 동서로는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길목으로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톡톡히 한 곳이다.
그러나 이런 지리적 요소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아마도 이 곳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일 것이다. 로마에 있는 교황청이 프로방스의 도시 아비뇽으로 옮겨 오고 급기야는 로마와 프랑스에 두 명의 교황이 양립하는 상황까지 이른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아비뇽이었을까? 당시 아비뇽은 프랑스 땅이 아니라 교황에게 충성하는 영주의 소유였다고 하니 대외적으로 프랑스와 로마 교황청의 중립적 위치로 여겨져 이곳이 선택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는 왕권이 강화된 프랑스가 교황을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 머물게 하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건을 말하는데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망하면서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있던 50여 년을 '바빌론 유수'라고 부른 것에 빗대어 '교황의 바빌론 유수'라 부르기도 한다.
교황권이 약화되면서 반대로 강력해진 프랑스 왕정이 교황청의 이전을 요구하게 되고 급기야 1309년 보르도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시작으로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까지 70여 년 간 모두 7명의 교황이 이곳 아비뇽의 교황청에 머무르게 되는데 로마로의 귀환에 반대하여 'Antipope'란 타이틀로 클레멘스 7세와 베네딕트 13세 두 교황이 1403년까지 아비뇽에 머물면서 동시대에 로마와 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기이한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아비뇽 교황청 <Palais des Papes>
1252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309년부터는 교황의 거처가 된 ‘빨레 데 파프(Palais des Papes)’라 불리는 아비뇽의 교황청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고딕 양식의 건물로 뽑힌다. 이곳에서는 6번의 콘클라베(Conclave:가톨릭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시스템. 라틴어로 원래 뜻은 ‘열쇠로 문을 잠근 방’이란 뜻)가 이루어졌다.
그런가 하면 책이 흔하지 않던 당시로서는 대단한 양인 2000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는 유럽 제일의 도서관이 있어 아비뇽의 교황청은 복잡한 역사적 현실을 떠나 글 좀 쓴다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인기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곳을 자주 찾던 문인에는 단테 이후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1304-1374)'의 이름도 올라 있으니 가히 교황청의 도서관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 아레초 출신이지만 아비뇽의 교황을 지지하던 아버지를 쫓아 아비뇽으로 이사를 온 덕(?)에 유럽 최고의 도서관을 이용도 하고 그의 영원한 연인 라우라를 만나기도 했으나 그는 교황이 아비뇽에 머무르는 것은 반대하였다고 한다.
교황청의 분열과 교권과 왕권의 대립으로 벌어진 '아비뇽 유수'는 1418년 주교단이 새 교황을 선출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교황청이 상주하고 있던 1348년, 아비뇽의 영주가 당시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아비뇽 땅을 모두 팔았다고 한다. 교황청의 소유가 된 ‘아비뇽’은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간 뒤에도 교황청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샤토뇌프 뒤 파페 전경과 교황의 문장(the papal regalia & insignia)이 새겨진 와인 라벨
아비뇽 2대 교황인 요한 22세는 아비뇽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자그마한 마을에 교황의 여름 별장을 지었다.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귀에 익은 이름 '샤토뇌프 뒤 파페(Chateauneuf-du-Pape)'다. 아비뇽의 교황들은 부르고뉴 와인을 선호했다는데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포도주 병에는 아직도 교황의 문장(교황의 왕관과 베드로의 열쇠가 그려져 있다)을 사용하는 와이너리들이 있어 교황은 떠났으나 와인은 남아 그 시절의 영화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듯하다. '교황의 여름 별장은 16세기 종교전쟁 당시에는 신교도에게 함락되어 불태워지고 훼손되었으며 그 후에 이 곳의 돌들은 마을의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쳐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마을 주민들이 이 성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감옥으로 사용되던 성의 일부라고 하니 한때 영화를 누리다 떠나간 교황과 이 건물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모든 유적들의 최후가 참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역사가들이 폐허가 된 거대한 석조 건축물들을 자조 섞인 단어로 ‘채석장’이라 부르지 않던가. 가장 큰 채석장은 물론 로마의 콜로세움이다.
3000평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아비뇽 교황청 건물은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간 뒤에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며 혁명의 격동기 중에 프랑스 정부가 이곳을 몰수해 버려 다시 프랑스의 품으로 돌아온 기구한 운명의 도시이기도 하다. 혁명 이 후로는 군대의 막사나 감옥 등으로 사용되다가 20세기 초에 와서 박물관으로 변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구 30만의 소도시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덕(?)에 ‘아비뇽’은 프랑스 내에서도 10 위안에 손꼽히는 관광지로 매년 70만 가량의 방문객들이 찾고 있으며, 그들은 한 때 이곳에 머물렀던 교황들의 흔적과 권세를 텅 빈 건물 안에서라도 찾아보고자 거대한 건물의 구석구석을 관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황청 입구 'Porte des Champeaux'
교황청 옆 노트르담 성당의 성모마리아와 십자가 예수님 조각상(좌), 교황청 안의 회랑(우)
교황청 건물은 입구에서 보기엔 일자형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ㅁ자 구조로 신궁전과 구궁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형태는 중세 건물답게 방어 위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파란 잔디밭과 아름다운 정원이 외관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유럽의 집들은 밖에서 볼 때는 그 집의 진가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단 문을 들어서면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정원이나 테라스 등이 구비되어 있어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도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아 정착된 주거 환경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본다.
신 궁전에 있는 교황이 예배 드리던 그랑 채플(Grande Chapelle)-클레멘스 6세가 예배 드리던 개인 공간이라 <Clementine Chapel>이라고도 부른다.
구 궁전에 있는 교황청에서 가장 큰 방인 그랑티넬<Grand Tinel>:6개의 아치형 창문을 통해 정원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그랑티넬 옆의 생 마씨엘 채플(Chapelle saint-Martial)의 프레스코화
교황청 건물은 너무 커서 입구에서 주는 지도를 꼭 받고 관람하는 것이 좋다. 굳이 어디가 신궁전이고 구궁전인지 따질 필요 없이 지도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교황청 관람은 끝나게 된다. 흘러간 과거의 영화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삭막하기까지 한 덩치 큰 고딕 건물은 어쩌면 역사의 흐름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황청 안으로 들어서니 성 안 광장에 무대 장치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날 밤 공연될 연극 무대라고 한다. 매년 7월에 열리는 아비뇽의 연극 축제(Festival d’Avignon)가 생각난다.
교황청 안 'cour d'honneur'에 설치 되고 있는 공연장
축제 중의 아비뇽 거리(위키미디어)
2차 대전 이후 무명작가나 신인작가들의 작품을 아비뇽 교황청 안의 무대에서 공연한 것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현재는 세계적 연극 축제로 자리 잡은 축제다.
매년 7월에 3주간 열리는 축제 기간 동안은 교황청을 비롯 도시 곳곳이 공연장으로 바뀌어 마치 아비뇽은 도시 전체가 연극 무대가 된 듯하다. 가능한 이 시기는 피해 아비뇽을 방문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에는 숙박 시설이 동이 나기 일수고 축제 분위기에 길거리 노숙을 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 같은 여행자들이 숙소를 못 구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 될 테니 말이다.
연극 공연은 주최 측 공식 초청(festival-in) 작품은 교황청 안의 무대에서 공연되지만 초청 여부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공연하는 (festival-off) 작품들도 수준이 아주 높아 두 공연의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하니 연극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좋은 축제기간이다.
교황이 떠나간 텅 빈 거대한 교황청 건물, 아직 교황의 문장을 달고 생산되는 와인, 교황청 건물 안에서 공연되는 무명, 신인 작가들의 연극들은 서로 묘한 관계를 형성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아비뇽이다.
특이한 모습의 생 베네제 다리
‘아비뇽’을 이야기하면서 론 강위의 유명한 다리 ‘생 베네제(Saint-Bénézet)’다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생 베네제 다리(Pont Saint-Bénézet)' 또는 '아비뇽 다리(Pont d'Avignon)'라고 불리는 이 다리는 지금은 다리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끊어진 다리이기 때문이다.
아비뇽의 또 다른 랜드마크인 베네제 다리에 얽힌 전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비뇽 노트르담 성당에 있는 베네제 성인의 동상
베네제(1163-1184) 성인은 아비뇽 지역에 살던 양치기 소년이었다. 그는 1177년 일어난 일식(eclipse) 중 론 강 위에 다리를 세우라는 천사의 말을 듣게 되고 혼자서 다리를 지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베네제 성인이 세운 다리는 알비젠시안 크루세이드(https://brunch.co.kr/@cielbleu/70 참조) 중 파괴되었고 그 후에 22개의 아치를 가진 다리로 다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원래 길이 900m에 달했던 다리지만 론 강의 잦은 범람으로 다리가 자주 유실되어 22개의 아치를 보존하는 것이 큰 난제였다고 한다. 잦은 다리의 유실로 결국 17세기에 들어와 이 다리는 더 이상 다리로서의 기능을 못하게 되었다. 현재는 22개의 아치 중 '아비뇽 유수' 당시인 1345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4개의 아치만이 론 강 중앙에 희한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아치의 두 번째 아치와 세 번째 아치 사이에는 ‘성 니콜라의 예배당(Chapel of Saint Nicholas)’이 자리하고 있는데 베네제 성인의 유해가 17세기까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17세기에 홍수로 다리가 유실될 때 그의 관이 열렸는데 그의 유해는 하나도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설은 늘 비슷한 패턴으로 전해진다는 것도 흥미롭다.
현재 그의 성유물(relics)은 아비뇽 노트르담 성당에 옮겨져 있다.
베네제 다리는 비롯 다리의 역할은 못하지만 오히려 특이하게 끊긴 모습 덕에 아비뇽의 주요 랜드 마크가 되어 교황청 건물을 배경 삼아 오늘도 론 강 위에 우뚝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