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으니 웃으며 살아야겠다
몇 주 전 친구와 전화로 새해 인사를 했다. 원래 내성적이라 친구가 별로 없다. 거의 없다. 언제 볼까 하는 내 물음에 친구는 진지한 이야기를 했다. 이제 날 보기 힘들다고. 나를 보면 하나도 즐겁지 않다고 했다. 아무리 신나게 놀아도 하나도 즐거워하지 않는 내 모습이 자길 슬프게 한다고 이제 만나기 싫어진다고 했다.
참 힘든 시간을 지나 이제 그 친구를 이해했다. 나에게도 그런 분이 계셨다. 나를 의지하고 연민을 바랬던 분이 계셨고 난 어느 순간 그분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만날 때마다 숨 막힐 듯한 슬픔이 내게도 전해졌기 때문에 힘들었고 만남 후에는 생각하기도 싫을 때도 있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
난 이 문장을 부정한다.
특히 슬픔은 나누면 절반 되지 않는다. 슬픔을 이야기할수록 사람들은 떠나게 된다.
그 친구는 내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주변에 발달장애아이를 키우는 사람과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들에게 공통점이 보인다고 했다.
‘웃어도 절대 환하게 웃지 않는다’
나도 공감한다. 나 자신이 그렇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 생일이었다. 대학교 때는 동기들 수십 명이 술집에서 내 생일을 챙겨주던 그들의 모습에 정말 생일날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마냥 기쁜 적도 있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생일이면 늘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을 되새기던 나였다. 그러나 며칠 전 생일은 참 좋지 않았다. 케잌이나 선물 앞을 무거운 현실이 가리고 있었다.
나를 우울로 힘들게 했던 그분을 멀리 했던 것처럼 내 친구도 나를 멀리한다는 걸 이제 알았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그렇다. 이제 억지로라도 웃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슬픔은 내 기도 안에만 두고 누구에게든 웃을 것이다.
봄으로 시작해 뜨거운 여름과 쓸쓸한 가을을 거쳐 겨울을 맞이하는 건 나만이 아닐 거다. 빈자든 부자든, 천재든 바보든, 그 누구든 마지막은 싸늘한 겨울이다. 주어진 현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좋은 점을 바라보고 가자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