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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Nov 04. 2021

"오매 단풍 들었네"

아름다운 경치를 보거나, 마음에 강한 울림이 생겼을 때 그 정도가 아주 심하면 흔히 “필설(筆舌)로 다하지 못 한다”고 이야기한다. 말과 글로 그것을 다 표현하지 못 한다는 이야기다. 


4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에 살다 보면 1년에 몇 번은 이런 느낌을 갖는다. 봄에 꽃들이 흐드러지게 필 때, 한여름 짙푸른 초록의 산을 멀리서 바라볼 때, 한겨울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여있을 때. 그리고 설명이 필요 없는 오색 단풍.


철들지 않는 천성 때문에 무던히 구경도 쫓아다녔다. 연극 구경, 연주회 구경, 영화 구경, 스포츠 경기 구경, 산 구경, 바다 구경, 강 구경, 도시 야경 구경...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단풍 구경이다. 모두 열거할 수 없다. 몇 가지만 생각의 갈래에서 추려보았다.


설악산 단풍을 보려고 족히 열 번은 시도를 했다. 물정 모르고 주말 오후에 설악동으로 들어갔다가 뱀처럼 늘어선 자동차 행렬을 보고 ‘현타가 왔다’(그때는 이런 표현이 없었지만). 포기하고 차를 돌렸다. 다음 해에는 경험을 살려 금요일에 속초에서 숙박을 하고 토요일 아침에 콘도를 나섰다. 이만하면 될 줄 알았다.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또 포기했다. 그 다음번에는 깜깜한 새벽에 숙소에서 나섰다. 소용없었다. 


나도 구경 좋아하지만 이 땅 사람들 참 구경 좋아한다. 산의 단풍이 다 거기서 거기라 우기며 돌아섰지만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다. 품 넓은 설악산의 다른 길로 단풍을 찾아 나섰다.


백담사 쪽으로 올라가는 길. 계곡물을 왼쪽에 두고 올라가며 먼 산을 보니 ‘만산홍엽’이다. 그나마 안다는 사자성어를 써먹었는데, 사방이 단풍이다. 백담사 앞 돌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는 단풍은 무어라 해야 할까. 백담사 경내를 돌아보며 만해 스님도 단풍을 좋아하셨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색약수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바라본 설악산의 단풍

큰 산 설악. 내가 시야가 좁아서 설악동만 고집했다. 백담사 계곡의 교훈을 살려 오색약수 쪽으로도 가 보았다. 주차장에 딱 한 자리가 남아 있다. 되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틀리지 않았다. 오색약수의 오색(五色)은 이 단풍을 보고 붙인 이름 같다. 천천히 급하지 않은 경사를 한 시간 정도 걸었다. 굽이를 돌아설 때마다 같은 듯 조금씩 다른 단풍이 그곳에 있었다. 올라가며, 내려오며 두 시간 가까이 눈 호강을 했다. 


치악산도 한 번은 가보았다. 11월 중순쯤이었다. 구룡사라는 절까지 걸어올라갔다. 단풍이 다 떨어졌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치악의 단풍은 설악보다 열흘 이상 늦었다. 마침 그 날은 대입 수능시험 날이었다. 절 안 어딘가의 스피커에서 끊임없이 학생들 이름이 흘러나왔다. “서울 **동 OOO학생의 합격을 기원한다, ... 기원한다, ... 기원한다”는 말이 쉼 없이 반복됐다. 구룡사는 용이나 단풍보다 합격 기원하는 절로 기억에 남았다.


이 외에도 적잖이 돌아다녔다. 여주 세종대왕릉으로 들어가는 길 양 옆에 늘어선 꼬마 은행나무 단풍. 앙증맞은 단풍을 보러 몇 차례 그 길을 찾았다. 지난 해 10여년 만에 다시 찾아갔더니 은행나무가 사라졌다. 이걸 바꾼 사람들은 그 은행나무를 보고도 아무 감흥이 없었나보다.


현충사로 들어가는 뚝방길 위에 1km 넘게 늘어선 은행나무. 몇 년 동안 연거푸 구경을 다녔다. 단풍 들 때를 딱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계속하다 보니 꾀가 늘었다. 현충사 관리사무소로 전화를 했다. “아직 아닙니다. 며칠 더 지나야 될 것 같습니다.”라는 정형화된 답변에 나처럼 묻는 사람이 많은가보다 했다. 그 은행나무도 가지치기로 볼품이 많이 떨어졌다. 


은행나무하면 용문산 용문사의 은행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빼어난 모습은 아니지만 나무의 나이와 크기를 생각하면 한번은 볼 만하다. 경기도 곤지암에 모 대기업 회장이 가꿨다는 화담숲도 단풍이야기에서 빠지면 서운해 할 것 같다.

화려하기로는 남이섬의 단풍도 빠지지 않는다.
경기도 화담숲의 단풍. 규모와 화려함 모두에서 으뜸이라 할 만하다.

먼 곳을 들먹이다 가까운 곳을 빼먹을 뻔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단풍 명소, 남이섬. 전나무길과 메타세콰이어길이 누리던 인기가 이맘때면 은행나무 길로 옮겨간다. 3주 전 쯤 가 보았더니 단풍은 아직 일렀다. 몇 년 만에 갔더니 입장료가 올랐다. 같은 단풍이지만 그 구경하는 값도 오르는 게 세상사는 모습이다.


서울 한 복판에서도 단풍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만 첫 손에 꼽을 곳은 정해져 있다. 바로 창덕궁이다. 창덕궁 안 ‘후원(後苑)’의 단풍은 정말이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다. 후원의 단풍 구경을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단풍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에 예약을 하던 기억이 있어서 찾아보았다. 금요일에 가려고 했더니 하루 6번의 관람시간이 모두 매진이다. 덕수궁을 가든가 아니면 남산이라도 올라야겠다. 


11/5(금)의 후원 예약 현황. 하루 종일 매진이다.

필설이 부족해서 도움을 청해 보았다. 단풍을 노래한 시를 꽤 찾아보았는데 별로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들도 필설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인가. 


요즘 MZ 세대들은 단풍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시를 떠올릴까. 라떼 세대인 나는 결국 이 시로 단풍 이야기를 맺는다.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이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오매 단풍 들었네.”


*사진 출처 :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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