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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제 Oct 11. 2021

이태원 사는 분 계신가요?

저도 살고 싶어서요.




한 주 내내 비가 오던 어느 금요일 친구랑 이태원에 갔다. 사실 나는 한강 남쪽으로 내려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멀기도 멀고 교통이 번잡하고, 높은 건물들에 기가 질리기 때문이다. 학교도 강북에 있고, 지금 살고 있는 곳도 도봉구라서 그런가 남쪽 동네에는 썩 정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이제 강북 좀 벗어나 보자는 대학 동기 쭈의 말을 따라 한강 남쪽 중에도 덜 싫은 동네인 이태원을 찾았다. 


이태원은 다양한 식당 및 가게들과 독특한 거리와 분위기 등 서울 어떤 곳들보다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 확실한 콘셉트가 있는 동네들을 사랑하기에, 큰맘 먹고 강을 가로질러 이태원 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도착하고 나니 1시 반이 좀 넘은 시간이었고 쭈랑 나는 뭘 먹을지 고민했다. 우리는 이태원까지 온 김에 피맥을 먹기로 했다. 피자를 한 조각씩 주문한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피자를 먹었고, 나는 사실 속으로 '와, 각자 한 조각만 먹는다니, 이게 진짜 다이어트식이 아닐까?'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곤 당연한 수순으로 주변 예쁜 카페에 들어와 커피와 케이크 하나를 놓고 약 2시간의 수다를 떨었다. 떠들 만큼 떠들고 밖으로 나와서 사진도 몇 장 찍고 나니 쭈가 인생 네 컷을 찍고 싶다고 했다. 인생 네 컷, 난 진짜 못 찍는 사진인데 그래도 남기면 추억이니까 하며 따라나섰다.


번화가라 부스가 꽤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좀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지도를 따라 여기저기 걷는데, 참 이상했다. 어떤 골목으로 들어가 끝없이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다. 경사가 엄청나서, 나는 북한산 등산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들어선 빌라촌은 내가 상상했던 이태원과는 조금 달랐다. 


산을 깎아 만든 동네에 빼곡히 들어찬 빌라들은 어디가 1층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 집에서 1층이 옆 건물에서는 2층이었다가, 반지하였다가 했다. 아슬아슬하게 설치된 난간 계단은 옥탑으로 향했고, 대체 대문이 어디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 건물들이 많았다. 경사는 얼마나 가파른지, 눈이 오는 날이면 썰매를 타고 산타처럼 택배를 배달해야 할 것 같았다. 또 건물 사이의 간격도 좁아서 여차하면 옆 집 티브이를 보면서 저녁을 먹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우리 둘은 충격받았다. 중간엔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데 싫진 않았다. 신기했고, 궁금해졌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보내고 있을까. 외국인이 많다던데 다 외국인이 사는 집일까? 여기를 밤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올라올까? 무섭진 않을까? 그래도 주변에 친구들이 많이 살면 너무 재밌겠다. 이태원에 살면 좋겠지? 부럽다 등의 여러 감정과 생각들이 들었다. 


물론, 남이 사는 집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품평을 늘어놓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 이런 집에 못살아!'가 아니라, '와, 나도 이태원 살면 어떨까?'로 기울었다. 마치 외국에 가서 마을을 둘러보며, 여긴 어떤 사람들이 살까? 하는 마음이랑 비슷하다. 단조롭고 심심하다 못해 지루한 도봉구 빌라촌에 사는 나는 어쩐지 그 동네가 부럽고 좋아 보였다. 서울이라고 다 같은 서울이 아니라는 것을 시골쥐는 체감했다.  


비 오는 날 인생 네 컷 한번 찍겠다고 온 동네를 구경한 그 15분은 번화가에서 피맥을 먹고, 좋은 카페에서 사진을 찍었던 경험보다 꽤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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