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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갑천씨

14. 갑천씨의 이야기 2

by 씬디북클럽

그리고 우리 딸,

사랑하는 내 딸.



아빠는 우리 딸이 정말 좋았어. 아들을 낳았는데 눈길 한번 안 준다고 네 엄마는 서운해했지만 내 눈에는 너만 보였단다. 나의 눈코입을 닮은 생명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존재할 수 있다니. 기적 같았어.


나는 틈만 나면 너를 물고 빨았지.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었단다. 주민등록번호를 새로 만들던 날, 날 닮은 너에게 나의 것과 한 자리만 빼고 같은 뒷자리를 줄 수 있어서 기뻤어.


우리 딸의 것이라면 여드름도 덧니도 다 예뻤어. 공부한다고 방문 닫고 들어간 너를 텔레비전 보자고 꼬드겼지. 눈을 흘기면서도 네가 방에서 나와 옆에 앉으면 좋았어. 흰머리 뽑아달라고 하고선 네 무릎에 누워 솔솔 오던 잠은 꿀맛이었어.


네가 친구들과 놀고 있던 어느 날, 나는 멀리서도 우리 딸을 알아볼 수 있었지. 큰 소리로 부르는 나를 너는 못 본 척 얼른 자리를 피해 가버렸지. 승용차가 아닌 짐 싣는 트럭을 모는 아빠가, 양복이 아닌 냄새나고 더러운 옷을 입은 아빠가 부끄러웠겠지. 그래, 아빠는 우리 딸 다 이해해. 그래도 속은 좀 상하더라. 왜 이렇게밖에 못 사는지. 우리 딸에게 더 잘해주지 못하는지. 그날밤에는 모처럼 아빠처럼 트럭 모는 아저씨들하고 소주 한잔을 했단다.

우리 딸 덕분에 대학교라는 곳을 처음 가보았지. 술이 잔뜩 취해 비틀거리는 너를 데리러 말이야. 집에 와서도 정신 못 차리는 너를 보며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손찌검을 한 날, 잠이 오지 않았어.


다음날 눈에 실핏줄 생긴 너를 보며 얼마나 마음 아팠던지. 미안하다 미안해. 후회해. 너는 인천 아닌 곳의 학교에 가고 싶어 했었지. 서울이든 지방이든 우리 딸을 절대로 혼자 살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만큼 소중하고 소중했어.


내 배에 누워 잠들던 조그만 너. 너의 손을 잡고 수봉공원에 놀러 간 일. 송도 유원지 바다에서 ‘아빠 무서워’하며 내 손을 꽉 잡던 고사리 손. 다 영화처럼 느껴지네.


성인이 된 우리 딸과 술 한 잔 못 한 일도 아쉬워. 그땐 왜 그리 일만 했을까. 아빠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었어.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었어.

온전한 정신의 마지막 모습을 우리 딸에게 보여서 다행이야. 동시에 네게는 잊지 못할 슬픈 장면을 남긴 것 같아 미안해. 맑은 물이 흙탕물이 되듯이, 정신이 혼탁해지는 와중에도 아빠가 한 말, 기억하지?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너를 지켜주는 아빠의 마지막 말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저기 우리 딸이 왔구나. 날 닮은 내 딸. 대학 생활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아르바이트하며 병원에 드나들며 수고한 딸. 내일이면 학교 축제 공연 날일 텐데. 수개월 동안 열심히 연습했을 텐데. 하필이면 하루 전날 아빠가 눈을 감아서 미안해.


우리 딸이 데려오는 남자친구 녀석과 회 한 접시에 소주 한 잔 하고 싶었는데.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너의 손을 잡고 그 길을 함께 걷고 싶었는데. 나를 닮고 너를 닮은 또 다른 작은 아이의 손가락을 잡아보고 싶었는데...... 우리 딸, 그만 울렴.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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