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밖으로 맘 속으로 무한반복하던 문장을, 책에서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뭐야. 내 맘 속에 들어갔다 나온 건가.
샤워하고 나오자마자 풍만하지 않은 가슴골로 땀이 흘러내리고, 연식이 오래된 에어컨은 딱 반경 1.5미터만 시원하며, 밀키트 하나 뜯어 냄비에 넣어 끓이기만 하는 초간단 조리조차도 극한의 인내심을 요하는 지금, 에어컨 on/off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 내리는 지금, 근데 무슨 입추냐.
네 번째로 좋아하는 계절.
작년 여름 브런치 글을 훑다가 우아하게 표현했던 글을 찾았다. 네 번째는 무슨, 극도로 싫어하는 계절이지, 난 여름이 싫어, 정말 싫어.
'입추 매직이다!' '올해도 입추 사이언스다!' 예전엔 그저 이 무렵을 기점으로 바람이 달라진다는 게 신기해서 한 말이었지만, 절기와 친해진 지금은 안다. 자연스러운 변화라는 걸. 절기는 천문현상을 관찰해 만든 과학적인 계절력이다. 해가 한 보 움직였으니 한 보만큼의 계절 변화가 생길 수밖에. 다산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기대 문인인 정학유는 <농가월령가>에서 입추 무렵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늦더위가 있다 한들 계절의 차례를 속일 수 없이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바람 끝도 다르다.
계절의 차례를 속일 수 없다니. 입추의 미묘한 변화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표현이 있다 싶어 기억해 둔다.
p194-195
당연히 가을로 들어서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입추'할 때 '입'이 당연히 '들 입(入)'인 줄로만 알고 마흔몇 해를 살았았는데. '설 립(立)'자를 이용해 각각의 계절을 마음속에 세우는 거였구나.
매직이고 사이언스고 간에 시간은 흐르고 흐른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네 조상님들이 관찰하고 기록하여 세운 절기에 따르면, 이 여름 또한 지나고 있는 중이고 다시 계절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2024년 여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입추의 숙제 하나가 더 생겼다.
■ 입추 무렵의 제철 숙제
□ 군청색 턱시도를 빼입고서 빠르게 나는 제비 찾아보기
□ 크게 부푼 뭉게구름을 관찰하고 노을 감상하기
□ 늦가을까지 하늘을 기록한 후 '올해의 구름'올해의 노을'뽑아보기
제비 찾기는 실패, '제비'라는 이름이 들어간 식당에서 천천히 여유있게 혼밥. 메뉴 이름은 한우 육회 냉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