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위유'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No mountain with yoonie의 약자로 2019년 즈음부터 우리 집에서 시작된 말이다. 가벼운 언덕 정도라는 부친의 말에 속아 집 근처 산에 오른 딸아이의 일그러진 표정은 사진첩 어딘가에 남아 있다. 나는 딸을, 아니 딸은 나를닮았을지도.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국 방방곡곡 거의 모든 산을 오른 이 여사의 딸임에도, 나는 산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한다.
산 타는 남편을 따라다니기 시작한 건 코로나 시기. 온 식구가 집에 있던 시절이었다. 약속을 잡을 수도 사람 많은 곳에 갈 수도 커피 한 잔 마시러 카페에 갈 수도 없던 시절, 그나마 안전하고 인적 드문 장소로의 일탈이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편과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동네 산을 오르다 블랙야크 명산 100 인증 재미에 야금야금 꾸역꾸역 전국의 산에 올랐었다.
남편이 인증 100을 향해 가는 동안, '본투비산혐오자'인 나는 서른 개의 인증 즈음에서 멈추었다. 주말 늦잠을 포기하고 새벽 일찍 일어나 나서는 것도 귀찮고, 흐른 땀 내음이 내 콧구멍으로 올라오는 것도 역했다. 나무가 바위가 하늘이 다 똑같고 똑같은 나무고 바위고 하늘이지. 내려올 걸 뭐 하러 올라가나.한 달에 두어 번 씩 인증하던 BAC 앱을 구석에 두고 잊었다.
백로의 날씨는 산책 생활도 바꾸어놓는다. 더위에 지쳐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던 때를 지나 선선한 바람이 등을 밀어주면 조금 더 걸어볼까, 저기까지만 더 가볼까 싶어 진다. (중략) 여름내 세상을 꽉 채운 초록을 보느라 한동안 변화에 둔감했던 마음에도 불이 켜진다. 달라진 것은 무엇이고, 여전한 것은 무엇인지 관찰하며 걷기 좋은 계절.
여름의 색이 서서히 빠져나간 자리에 어떤 색들이 내려앉기 시작했는지 지켜본다. 한 그루 나무에서 가장 먼저 물들기 시작한 이파리를 찾아내는 건 이 무렵 산책 생활자의 작은 기쁨 중 하나. p213
모처럼 산에 가볼까 싶어진 건 순전히 '제철 숙제'때문이었다. 백로 부분을 예습해 읽다가 발견한 도토리 6형제와 새우튀김 이야기. 남편이 산에 간다는 날짜가 마침 백로. 그래, 가자. 새우튀김 찾으러, 도토리 모자 보고 나무 이름 맞춰보러. 주말 학원 빠지고 싶다고? 그래, 아들아, 너도 가자.
두 남자와 함께 찾은 산을 충북 괴산에 위치한 대야산. 등산로 초입답지 않게 평탄한 흙길이 오래 이어지더니, 평평한 바위가 돗자리 마냥 펼쳐진 계곡이 등장했다. 올, 오늘 산 여유로운데. 내려오는 길에 발 담그면 되겠네. 이런 산이면 1일 2 산도 하겠네!..... 느낌표는 아무 때나 남발하는 게 아니었는데.
다람쥐와 청설모들이 발라 먹고 버린 잣송이나 솔방울 모양이 꼭 새우튀김 같이 생겼다고 책에서 그랬는데. 두 남자를 앞세워 새우튀김 찾기 미션을 시행할 때만 해도 괜찮았다. '도토리나무'가 있는 게 아니라 몇몇 나무의 열매를 다 도토리라고 한대. 어떤 나무일까요? 퀴즈를 낼 때만 해도 즐겁기만 했다. (정답은 잠시 후에 공개) 계곡이 마치자마자 이어지는 경사, 불안정한 밧줄, 전날 내린 비바람이 떨어뜨린 나뭇가지나 이파리들이 내내 미끄덩거렸다. 새우튀김도 도토리도 눈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모처럼 만난 초가을 산이 뿜는 내음을 맡을 겨를도 없었다.
오르막길이 있으니 내리막길이 있다고,
내려오는 길은 더 쉽고 빠르다고 누가 그랬던가.
대야산 정상석
정상석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길은 더 힘들었다. 평소 같으면 어서 내려가 맛있는 음식 뭘 먹을까 행복한 고민에 발걸음이 가벼웠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오르는 길이 너무 고되다 보니 같은 길을 또 내려갈 일이 최대한 미루고 싶은 숙제 같았다.
발에 딱 맞는 등산화도 문제였다. 내리막길에 발이 앞으로 쏠리고 두꺼운 등산 양말까지, 발가락이 너무 아팠다. 괜히 왔어 오지 말걸이라는 마음이 가득 차 툴툴 거리는 순간, 주르륵 길게 미끄러졌다. 이게 다 그놈의 제철 숙제 때문이야!
남편과 처음 함께 오른 명산 리스트는 관악산. 남편은 신이 나 성큼성큼 걸었고, 아내는 꾸역꾸역 거북이처럼 오르고 오르는 중이었다. 저만치 앞서 뒤를 돌아보며 두 손을 허리춤에 얹고 나를 바라보는 모습은 극기훈련 조교의 모습 같았다. 간신히 거기까지 가면 바로 출발하는 모습에 버럭하고 말았다. 같이 걷자고 오는 거지, 나 훈련시키려 온 거야? 그 뒤로 위험한 길을 제외하고는 남편은 내 뒤꽁무니를 따라온다.
아들과 함께 오른 리스트도 관악산이었다. 세 번째 오르는 남편, 두 번째 오르는 나와 달리 첫 경험의 아들은 잽싸게 날랜 걸음을 놀렸다. 토끼띠인데 실은 날다람쥐띠였나. 신나게 오르는 모습을 보며 지 아빠 닮아 산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처음이자 마지막 함께 한 산이었다.
앞뒤로 두 남자가 나를 호위했다. 괜찮냐고 끝없이 물었다. 내미는 손을 잡고 디디는 발을 따라 걸었다. 느려진 걸음 탓에 속도가 나지 않았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만난 계곡.
두 남자는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물로 향했다. 짜릿한 시원함에 한 번, 가시는 피로감에 또 한번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머리를 들이밀고 세수를 하며 행복해했다. 햇살에 반짝이는 얼굴들에 보고 있는 나조차 기분이 좋아졌다. 흐르는 물에 후끈거리던 발을 담그니 힘이 나는 것도 같았다.
가을의 숲길을 걸으며 몰랐던 걸 하나씩 알아가는 건 즐거운 일이다. 숲길을 걷는 동안 나무와 열매를 유심히 살피는 일. 도토리 모자만 보고도 정확하게 나무의 이름을 호명할 수 있게 되는 일. 어떻게 그런 걸 알아? 묻는 말에 좋아하면 알게 돼, 대답하는 일. p220
두 남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늘어난 주름과 흰머리, 어느새 훌쩍 큰 키와 눈으로 봐도 단단한 허벅지. 닮은 듯 다른 뒷모습과 다른 듯 닮은 걸음걸이까지. 일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가을의 숲길에서는 또렷이 보였다. 유심히 살펴 오래 보았다. 좋아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일은 즐거운 일.
새우튀김은 찾지 못했고 도토리들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아들은 최애 메뉴 해장국에 공깃밥 세 그릇을 비웠다. 저녁에는 (진짜) 새우튀김과 도토리묵을 먹을까.아들은다음 산에도 함께 오르기로 했다.나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