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치 포테이토 (Couch Potato, 하루종일 소파에 누워 빈둥대는 사람)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 유형 중 하나로, 주 7일 우리 집 저녁 시간이면 종종 볼 수 있다. 때때로 두 명이나 세 명으로 늘어난다. 지난 토요일에는 나도 거기에 동참했다.
내가 밥 해 먹고 치우는 건 귀찮은데 남들이 산지에서 직접 수확해 밥 한 끼 해 먹는 걸 보는 건 왜 그리 재미있는지. 완전히 혼자서 살아본 경험이 없어 그런가, 싱글 남녀의 일상은 화면 만으로도 대리만족이 된다. 전지적 3인칭 시점이 되어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렸다. 먹고 눕고 또 먹고 또 눕고. 러브 핸들 (Lovehandles, 허리의 군살)을 잡고 이리저리 돌릴 수 있을 지경이다. 젠장.
"어쩜 좋아! 날씨 대박!
이런 날은 감자도 핸들도 거부할 테야!"
입추매직도 처서매직도 무색한 추석(秋夕), 아니 하석(夏夕)을 보냈는데. 에어컨 전원에 기분이 좌지우지된 게 엊그제인데. 하루이틀 새 바람이 달라지더니 매일 하늘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4월에는 연분홍, 5월에는 붉은색이더니. 9월에는 하늘색, 말 그대로 하늘색 바탕에 흰 구름 사진이 사진첩을 채우는 중이다. 또 한가득 사진첩을 채우려 운동화끈을 동여맸다.
좋은 신발은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데 제철 감각 역시 우리를 좋은 장소로 데려다준다. 이맘때 어디에 있어야 조금 더 자주 웃게 되는지를 알고 사는 것만으로, 자잘한 추억을 스탬프 찍듯이 적립할 수 있다. p224-225
남한산성, 소설과 영화로 익숙한 곳이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차막힐 줄은예상했지만 이렇게나 막힐 줄이야. 설마 다들 저처럼 추분 제철 숙제를 하러 나오신 건가요. 졸다 깨다 반복하다 차를 세웠다. 흙길을 걷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도토리 모자를 발견하며 혼자 좋아했고, 달고나 내음이 나는지 코를 킁킁댔다. 아는 만큼 보이는 줄만 알았는데, 냄새도 맡을 수 있구나.
고민과 염려가 머리부터 가슴까지 관통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 어찌할 수 없는 상황과 분위기에 혼자 끙끙 앓는 시절을 통과하고 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 한번 본 사진, 한번 들은 말에 다친 마음은 쉽게 낫지 않는데. 지금 내 앞의 모습과 밖에서의 모습이 분명 다를 텐데. 인정하고 수긍하고 믿어줘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나는 뒤끝 있는 사람. 고구마 한입 가득 꽉 막힌 심정이 오래갈 예감이 든다. 몸을 움직이는데도 머리와 가슴과 마음을 비워낼 수가 없다.
파란색 물감을 풀어놓은 하늘에 눈길을 뺏겼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신하에게 머리를 조아렸을 역사에 가슴이 아렸다. 집 근처 행궁과 다른 듯 닮은 분위기에 천천히 오래 걸었다.
비울 수 없는데 억지로 애쓸 것 없다. 머리 아프면 아픈 대로, 패인 상처는 패인대로, 가슴과 마음이 그러하면 그러한 대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한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계절의 바람과 공기와 온도에 기대어 그냥. 그냥 그렇게.
다음에는 넷이서 왔으면 좋겠다. 행궁도,만해 기념관도 같이둘러보면 좋겠다. 도가니에 담긴 백숙을 먹고 놋그릇에 담긴 빙수를먹으면 좋겠다. 그땐 초록빛보다 붉은빛 주황빛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좋겠다 좋겠다 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정말 좋아지기 시작했다.
충분한 추분.
추분의 충분.
바쁘게 살수록 그런 여유를 챙겨야 한다. 서해 모래사장에 무수히 난 조그만 동그라미들처럼, 그게 우리의 숨구멍이 되어주니까. 일몰이 아쉬운 것도 잠시, 가을 하늘은 해가 사라진 뒤부터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10여 분 넘게 상영해 준다. 노을은 참 신기하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서 이런 걸 보니 좋다는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만드니. (중략) 좋은 기분도 결국 내가 만드는 거라는 생각. 1년 중 가장 사랑하는 온도를 찾아내어 초여름엔 싱그러운 숲으로, 더위가 한풀 꺾인 초가을엔 노을 지는 바다로 떠나는 건 내 기분을 위한 작은 노력인 셈이다. p227
덧) 그림책 <가을에게, 봄에게>
몰래 매만져 보던 보드라운 손등 위 솜털, 혼자 웃으며 손가락을 대어보던 새근새근 콧바람, 하얀 볼에 분홍빛 하트를 기억해. 계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 인구의 3%에 불과하다던데. 동그란 머리통에 코를 박으면 맡을 수 있던 캐러멜처럼 끈적이고 달콤한 내음을 정확하게 기억해. 아이유의 '가을 아침'을 플레이 리스트에 담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떠오르지.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만날 수 없겠지. 그치만 봄 이모의 한 시절에 어린 가을, 네가 담겨 있단다. 어쩌면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