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이 물들기 시작하고 새 계절의 바람이 살랑 간지럽히는 10월이면, 젊음의 거리대학로에는 부쩍 여성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진다. 올해로 마흔 두 해를맞이하게 된 마로니에여성백일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여러 부서 및 기업에서 공동 후원하는 문화 행사이다.국내 여성백일장의 가장 오랜 전통을 지키고 있는 이 행사는, 여성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고 수상자에게는 총 상금 4,000만 원이 부여된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찾은 혜화역은 여전했다. 펜과 원고지, 노트북을 챙겨든 여성들이 가득했고, 크고 작은 행사 부스와 단체 체험학습을 온 학생들의 긴 줄도 보였다. 노란빛은 덜 여물었지만, 충분히 가을이었다.
작년 시월이 참 좋았던 나는 다른 이를 이끌었다. 함께 글 쓰러 가자고, 함께 밥 먹고 커피도 (또는 술도) 한 잔 마시자고, 함께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을 만들자고. 그리고 시간도 맞으면 우리들을 '작가'라고 처음으로 불러준 그곳에도 함께 가 보자고.
날짜도 마침 딱 한로, 아침저녁공기는 서늘하지만 한낮의 햇살은 딱 좋았고, 올가을 처음 꺼내 입은 트렌치코트 역시 적당한 드레스 코드가 되었다. 야외 카페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차갑게 느껴지던 작년과, 스터디 카페를 방불케 하는 스타벅스의 블랙 글레이즈드 라테 한 잔이 딱 좋았던 오늘이 공존했다.
"대학로 가셨어요?
올해는 장원하셔야죠!"
작년의 나를 이끌었던 이의 다정한 전화. 가볍게 던진 그의 말을 무겁게 받아 내내 이고 지고 있던 일 년. 그 사이 나는 또 한 뼘 자랐다.이고 지고 있던 그 이야기를 이번에는 기어이 원고지 위로 내려 옮길 수 있었다. 눈물을 꾹꾹 눌러 참고, 연필로 꾹꾹 눌러썼다.
4시 44분, 어둑한 새벽창밖을 바라보다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고 퇴근 후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즐기던 한 트럭 운전수 생각을 했다. 기억의 서랍 속 깊이 넣어 두었던 이야기를 끄집어 내려다 실패하고, 엄마와 어머님과 책모임한 이야기를 썼던 작년이었다.
지우개로 싹싹 지워도 남아 있는 연필 자국처럼, 일 년 동안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썼다. 백일장 축하 공연이 끝난 무대 위, 호명되어 올라가지 못했어도 괜찮았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말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바늘 한번 실 한번, 한 줄 한 줄 지난한 날줄과 씨실의 반복을 견뎌내는 뜨개질처럼, 한 글자 한 문장, 타닥타닥 빈 용지를 채워가며 계속해서 쓰고 싶다. 내년의 은행나무가 빛을 발할 때 다시 이곳에 오고 싶다. 기다림은 벌써부터 설렘이 되었다.
(작년과 올해 백일장에서 선정된 주제어를 이용해 쓴 글입니다.)
브런치스토리 성수동 팝업 (2024.10.3-10.13)
부랴부랴 채워낸 원고지를 제출하고 혜화역 2번 출구로 내려갔다. 미리 예약해 둔 성수동 브런치스토리 팝업. 한번 서울 나서기가 쉽지 않은 경기도민은, 백일장 시상식까지의 틈새를 또 다른 글감으로 채웠다. 미리 예약해 둔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고, 예상보다 알찬 전시와 기념품에 가방도 마음도 가득 찼다.
'작가가 작가에게'라고 적힌 종이에 서로에게 짧은 편지를 쓰고 맞바꾸었다. 덕분에 이런 곳에도 와 보네요, 이런 행사에도 참여해 보네요, 유난히 자주 짓는 미소에 나 또한 행복해졌다.
"그녀를 따라가다 보면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장소에 있게 된다."
"나의 서사에 당신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면, 당신의 서사에 나의 이야기가 담길 수 있다면, 진작에 달뜬 마음이 됩니다."
각각 적어낸 우리의 글은 오늘의 장원이었다.
"다음에도 또 같이 와요."
내년 10월의 To-do 리스트 한 줄. 제철 행복 하나를 미리 채웠다. 오늘을 떠올리며 우리들의 다정한 안부를 물을 수 있기를 바라며.
제41회 & 제42회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
2023 & 2024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
2023 & 2024 나의 글쓰기 공간
2023 & 2024 참가자 기념품
2023 & 2024 맛있게 한 잔
그러고 보면 제철 행복은 결국 '이때다 싶어'하는 일들로 이루어진다. "요즘은 무화과가 제철이야. 이거 먹어보니까 맛있더라." 제철 과일을 챙겨 먹고 누군가에게 부쳐주는 일도, "이맘때 고창 선운사 꽃무릇이 그렇게 예쁘대. 보러 가자"하면서 지금 가야 가장 근사한 풍경이 기다리는 곳에 함께 찾아가는 일도. 혹은 더워서, 추워서, 비가 와서, 눈이 와서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하는 것도 모두 제철 행복의 목록. 그렇게 생각하면 계절과 날씨에 발맞춰 산다는 게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제철 행복 챙겼어? 하는 말이 언제까지라도 우리들의 다정한 안부 인사가 될 수 있기를. p237-238
궁을 좋아한다.
카페도 한옥 카페면 일단 오케이다.
전생에 중전이었는지,상궁이나 수라간 무수리였는지. 서울 도심 속 웅장한 경복궁도, 비운의 덕수궁도 좋아한다. 방문할 때마다 늘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작년 이맘때 즈음에는 조선 5대 궁궐 중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도 하루에 돌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얼른 나와!
미디어 아트 보러 가야지!"
도보 10여 분 거리에 성곽과 행궁이 있다는 건 얼마나 드물고 귀한 일인지,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수원 화성 문화제가 시작되었다. 10월 6일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을 비롯해, 수원화성 일원에서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들을 만날 수 있다. 14년 차 수원시민으로서,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일부러 챙기고픈또 하나의 제철 행복이 되었다.
도심 속 궐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질감과 신선함. 오십 년도 되지 않았을 건물들 사이로, 오백 년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돌과 흙으로 지은 궁과 성곽, 사찰등은 살아 숨 쉬는 역사 교과서라는 생각이 든다. 이 돌을 조선 시대 김개똥이가 날랐을까, 이 기왓장을 이 돌쇠가 올렸을까. 정조 대왕은 화성을 지으며 근로 시간 준수 및 임금 책정도 명확히 했다던데. 하루 일과를 마치고 주막에 들러 국밥에 막걸리 한잔씩들 했을까.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공간에서 만날 수 없는 백성 아무개의 일상을 상상해 보는 일도 소소한 재미가 된다.
"당신이 좋아하겠더라.
다음에 같이 가자."
혼자만의 가을산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남편에게서 도착한 메시지. 한양도성 성곽길을 걷고 북촌 한옥마을에 내려오니 삼청동 수제비집에 줄을 잔뜩 섰단다. 성곽길, 한옥, 수제비, 세 단어 만으로 맘 속으로 "콜!"을 외쳤다. 작년에 대강 살펴본 창덕궁 후원에도 호젓하게 걷고 싶고, 창경궁 온실에 관련된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읽고선 책을 들고 가고 싶고, 매일 먹을 수 있는 메뉴 중 하나인 수제비도 먹고 싶고, 스벅 말고 한옥 카페에서 진짜 맛있는 차 한 잔도 마시고 싶고.....
봄, 여어어어어어르으으으음을 지나고 간신히 맞이한 가을, 아니 '갈'이 스치듯 지나고 곧 '겨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울'이 될 거라던데. 짧아서 아쉽고 찰나라 더욱 소중한 나의 두 번째 최애 계절을 마저 열심히 즐겨야겠다. 다음 주말의 할 일, 다이어리 칸이 벌써 다 채워졌다. 계절이 수이 감은 아쉽지만 다음 절기를 기다리는 맛은 달짝지근하다.
(중략)... 도심 한가운데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궁이 여럿이란 사실도 드물고 귀한 일이란 걸 깨닫는다. 오를 수 있는 곳을 오르고 걸을 수 있는 곳을 걸으며 옛사람들의 발자국에 오늘의 발자국을 겹쳐보아야겠다.
바라건대 뭇꽃들이 다 시들어버린 뒤에 피어나 찬 서리를 맞으면서도 지지 않는 국화처럼, 그 모든 유산이 내내 아름답기를. 그리하여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나 같은 이가 있어 등고의 시작의 역사를 뒤적여보다가 여전한 그 산과 연못에 찾아가 거닐 수 있기를. p244
■ 한로 무렵의 제철 숙제
□ 햇볕과 바람과 이슬이 알알이 담긴 가을 제철 과일 먹기
□ 등고하기 좋은 주변의 산을 찾아보고 시간 내서 다녀오기
□ 성곽 길, 왕릉, 고궁, 사찰 등 세월이 오래 쌓인 곳 어디든 걸으며 그곳에 담긴 옛이야기 찾아보기
과일도 채소도 너무너무 비싼 요즘, 그래도 모처럼 맘 먹고 귤이랑 샤인머스켓 두 박스 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