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선 주로 F인 나는, 산에 오르기만 하면 T가 된다. 산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산을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 새벽부터 나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나무를 봐라, 구름을 봐라, 경치를 봐라, 주문하는 게 왜 이리 많은지. 이 날도 그랬다.
3년 전 코로나 시절, 블랙야크 100대 명산 인증을 함께 시작한 남편이 88개 인증 도장을 찍는 동안, 나의 도장은 서른 개 남짓에 불과했다. 장거리 운전을 자처하고, 등선처럼 감정이 오르락 내리는 아내를 보필하는 정성은, 모두 산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했다. 산에 가는 날은 설레고 들뜬 기분이라고 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모를 기분.
"좋아하는 책을 쓴 작가님을 만나러 가는 북토크 기분이 그랬던 것 같은데. 요새는 그런 설렘과 흥분이 없네."
"전국 100개의 산 지도 점이 검은색이었다가 하나씩 인증하면 빨간색으로 표시되거든. 천천히 붉게 물드는 걸 보는 게 내는 참 좋다."
"아! 내가 스타벅스 프리퀀시 채우는 거랑 비슷한 기분인 걸까?"
"니 그거 작년에 하고 다시는 안 한다 했던 거 아이가?"
봄의 벚꽃에 비해 단풍은 좀 너그러운 구석이 있다. 벚꽃 명소를 부러 찾아가야 했던 봄과 달리 단풍은 주변을 둘러보면 어디에나 있으니까. p249
올려다보는 단풍의 계절에서 내려다보는 낙엽의 계절까지, 내가 생각하는 숙제는 하나다. 이 가을을 끝까지 써야지. (중략) 이 계절을 끝까지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까워라, 하는 마음으로. p251
그 나무가 그 나무 같고, 그 산이 그 산 같기만 하지만, 생생하게 기억하는 산은 바로 설악산이다. 2년 전 10월, 남편과 함께 오른 설악산 대청봉은 10시간에 가까운 시간 소모와 더불어, 험준한 산세, 끝도 없이 이어진 내리막길 때문에 힘듦의 절정으로 남아있다. '거의 다 왔다'에 대한 서로의 좁힐 수 없는 간극 때문에 '밀어 버릴까' 싶었던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선명하게 기억할 가을의 한 장면이 되었다.
2022.10.01. 설악산 대청봉 등산
기후 탓인지 올여름은 무척이나 뜨겁고 길었다.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가을이 왔다고는 하지만, 낮에는 더웠고 아침저녁에만 쌀쌀했다. 애매한 날씨 핑계로 옷장 정리도 미루던 참, 그래도 가을을 보고 싶었다. 단풍을 보고 싶었다. 벚꽃 명소를 찾지 않아도 아파트 단지가 온통 분홍빛이던 봄과 달리, 단풍도 은행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올해 가을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2024.11.02. 평창 백운산
봄꽃은 아래에서 위로 오고, 단풍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하니 조금 더 남쪽으로 가면 좋았겠지만, 이번 주말 부부 산행의 목적지는 동쪽이었다. 수북이 쌓인 낙엽 밟는 소리와 재미도 잠시, 완경사를 버리고 택한 급경사 등산로 내내 낙엽길은 큰 가시밭길이 되었다. 오를 때도 힘들었지만, 내려올 때는 위기일발의 연속. 살짝 내린 가을비는 어여쁜 구슬이 되어 낙엽 위에 내려 앉더니, 미끄럽고 가파른 고난의 하산길을 만들었다. 1 산 1꽈당의 징크스는 수차례의 쭈르륵과 꽈당이 되었고, 무릎이 까지고 허벅지에 멍이 들었다.
내내 투덜댔고 후회했다. 이까짓 산이 뭐가 좋다고. 뭐 하러 이 고생을 하냐고. 마음껏 투덜대도 들어줄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끝없는 투정을 인상 찌푸리는 일 없이 죄다 들어주고 받아주는 이도, 그였다.
단종 유배지 동강의 물길은 나무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고, 겨울 올림픽을 치른 마을답지 않게 인적이 드물었다. 강원도에 왔으니 막국수를 먹어야지 하고선 찾은 시장 골목에서 메밀이 들어간 여러 전을 바로 부쳐 주는 집을 발견했다. 가마솥뚜껑을 뒤집은 팬에 기름을 두르고 쪽파와 김치 두어 쪽을 올리고 메밀 반죽을 얇게 부쳐내는 어르신 앞에 감탄하며 서 있었다. 얼굴보다 큰 전 한 장을 부쳐내는 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무심한 손길에서 숭고한 장인 정신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단단하게 응축된 마음도.
"포장해 가서 막걸리랑 저녁으로 먹자."
"응, 애들도 먹게 세트 두 개 포장하자."
"장모님도 갖다 드리게 세 개 주문해."
주말 등산을 시작한 이유는 남편과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주로 일방적인 투정과 한숨과 걱정이 난무하지만, 그래도 대나무숲 마냥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앞에서는 무장해제되는 기분. 뜨끈한 메밀 전 한쪽을 운전하는 그의 입 속에 쏙 넣어 주며 말했다.
"우리 다음 주에는 어느 산에 가?"
그렇게 다들 가을에 진심인 걸, 아름다움 앞에 열심인 것. 그 마음을 헤아리면 이 모든 소동이 극성이 아니라 정성으로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성수기가 성수기인 이유는 그때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당연한 사실과 함께. 우리는 저마다의 제철 숙제를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다. p252
가을의 이미지는 대체로 그런 편이다. 절정에 이르렀던 것들이 쇠락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허망함. 하지만 단풍이 우리 보라고 저리 화려하게 물든 것이 아니듯, 낙엽 또한 쇠락의 이치를 일깨워주려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