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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씬디북클럽 Oct 22. 2022

여름의 김밥

그해 여름, 김밥과 그녀들

  “내 인생 오점 중의 하나다.

요새 애들 말로 흑역사다, 흑역사.”  

   


  처음이자 마지막 사업을 이여사는 그렇게 정의 내렸다. 그녀는 20여 년 전 남자고등학교 앞 작은 분식집 사장님이었다. 빨간 간판에 하얀 글씨로 쓴 ‘엄마 김밥’이었다.


  남편을 잃은 지 수년이 지나지 않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딸은 휴학 후 어학연수를 갔고, 대학 새내기 1년을 마친 아들은 바로 군대에 갔다. 학교 급식실에 근무하고 있던 이여사에게 난생처음 사업 제안이 들어왔다. 남고 앞의 작은 분식집. 남매의 학비 벌이에 허덕이던 그녀는 솔깃했다. 자금을 모으고 대출을 받아 김밥집 사장님이 되었다. 딸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김밥집 서빙을 도왔다.    

  

  김밥 1줄에 천 원, 라면 한 그릇에 천 원 하던 시절이었다. 장성한 남학생들 냄새와 음식 냄새가 뒤엉키는 시간이었다. “라면 2개 김밥 두 줄 주세요.” “여기 국물도 주세요.” 홀에서는 딸의 쟁반이 위태롭게 움직였다. 주방에서는 라면 냄비들 사이로 이여사의 손과 발이 바쁘기만 했다.

      

  한 블록 건너 방문판매 화장품 대리점에서 대량 주문이 들어왔다. 무려 50줄. 이여사는 전날부터 준비한 재료들로 아침부터 김밥을 쌌다. 바쁜 손놀림 속에서도 신명이 묻어났다. 딸은 옆에 앉아 은박지로 한 줄씩 포장해 차곡차곡 쌓았다. 가게를 비울 수 없는 이여사를 대신해 딸이 김밥 배달을 갔다. 노란 장바구니를 든 스물세 살의 딸은 조금 부끄럽다.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칠 새라 후드티의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무사히 배달을 마치고 숨을 돌리던 차, 가게 전화벨이 울렸다. 촉이라는 게 있다. 벨소리가 평소와 다르다. 전화를 받은 이여사가 나를 앞 장세 워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김밥 50줄을 배달한 3층짜리 사무실 건물이다.      


  “이거 오늘 싼 거 맞아요? 아줌마, 김밥 맛이 이상해. 상한 거 아냐?”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 하나가 팔짱을 끼고 문 앞에 서 있다. 펼쳤다 도로 싼 듯한 은박지 사이로 재료가 흩어진 김밥들이 보였다. 그럴 리가 없다며 오늘 아침에 싼 김밥이라며 이여사가 김밥 하나를 손으로 집어 입에 넣고 거칠게 씹었다. 딸은 한 발짝 뒤에서 파마기가 풀어진 이여사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억울한 듯 정색한 표정이 뒤통수로 보인다. 입안 가득 욱여넣은 김밥도 보인다.     

 

  김밥집 모녀가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온다. 이여사 손에 들린 바구니에는 김밥 50줄이 그대로 들려 있다.


  “멀쩡하구먼 상하긴 뭘 상했다고 그래. 여편네들 까탈스럽기는.”


  딸은 바구니를 넘겨받아 한 발짝 뒤에서 이여사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역정을 내는 목소리가 떨린다. 두 눈 가득한 물기를 들킬 새라 후드티의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쓴다.       





  “김밥은 믿음직스러워요.


  재료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예상 밖의 식감이나 맛에 놀랄 일이 없습니다.”     


  매일 아침으로 아버지가 싸주는 김밥을 먹는 그녀. 서툰 젓가락질로 동그란 김밥을 반듯하게 한 줄 기차를 세우고는 하나를 집어 입 안 가득 넣어 꼭꼭 씹어 먹는다. 깨끗이 비운 접시 위에 냅킨 한 장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헤드폰을 쓰고 김밥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선다.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같은 이름을 가진 그녀의 매일 아침 출근길 풍경이다.     


  지난 무더운 계절 내내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한 그녀. 그녀의 이름이 적힌 김밥집 촬영지로 한적한 아침 산책을 나선다. 담장이 넝쿨 한가득 담벼락이 있는 이층 집에서 내려와 아버지의 김밥집에서 아침을 먹고 언덕길로 내려가는 그녀가 보이는 듯하다. 또각또각 신이 난 발걸음의 구두굽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그녀의 그리고 나의 다음 계절은 아름답고 가치 있기를 가만히 응원해 본다.        

   

  오늘 저녁에는 모처럼 김밥을 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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