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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씬디북클럽 Oct 26. 2022

가을 편지

그녀에게


잘 지내시죠?



단 한 번의 글로도 음성으로도 전하지 못한 안부를 스산해진 바람을 핑계 삼아 전합니다. 너무 흔한 편지의 시작 인사말로 말이에요. 잘, 지내고 계시죠?


예전 생각을 자주 하면 나이 들었다는 뜻이라던데, 종종 예전 생각을 해요. 10년도 훨씬 지난 그 공간으로 날아가곤 해요. 그곳에는 돌쟁이 아들을 안고 있는 제가 있어요. 그리고 젊고 예쁜 당신이 있어요.


물방울무늬 빨간 앞치마와 토끼 머리띠를 한 첫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계이름 솔 톤으로 밝고 맑게 말하고 노래하던 음성은 핑거 심벌즈의 울림 같았을까요, 알토 메탈로폰의 떨림 같았을까요. 소극적인 아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아이의 엄마는 앞에 선 예쁜 선생님에게 홀딱 반했었다는 고백을 이제야 해 보아요.


나도 저렇게 말하고 싶다, 저렇게 노래하고 춤추고 싶다, 저렇게 아이들과 엄마들과 소통하고 싶다... 저의 바람을 들어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던 순간도 기억해요. 응원의 말씀 덕분에 저 역시 빨간 땡땡이 앞치마와 토끼 머리띠를 한 선생님이 될 수 있었어요. 당신을 따라서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다 보니, 조금은 당신을 닮은 선생님이 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오랜 시간 그 곁에서 함께 할 수 있었어요.


책을 읽고 모임을 하고 산을 오르고 전시회에 가고... 지금 제 나이에 당신이 하던 일들이네요. 큰 토끼 선생님을 따라 하던 작은 토끼 선생님은, 그때의 당신을 따라 많은 일들을 하고 있어요.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과 소박한 바람을 쌓아가고 있어요. 이해도 공감도 할 수 없어 그저 당신을 원망하고 미워하던 순간도 있었어요. 그랬던 제가 조금씩 조금씩 여러 갈래의 길들을 기웃거리고 있어요. 한발짝 한발짝 내딛고 있어요.



오 창백한 데이지 꽃이여!

그대 역시 나처럼 한낱 가을 햇볕이 아니던가?

오 참으로 새하얀, 오 참으로 차가운 나의 데이지 꽃이여!

(샤를 보들레르, 가을의 소네트 中)



시인의 강렬한 노래와 화가의 담백한 그림이 가을을 노래해요. 흔히 볼 수 있는 이 그림을 보면 당신이 떠올라요. 선물해 주신 시집 맨 앞 페이지 그려주신 하트, 이제야 가슴속에 담아 볼게요. 2월 14일에 전해주신 시집을 펼쳐 보아요. 언젠가 같은 날짜에 달콤 쌉싸름하고 따뜻한 커피 두 잔을 앞에 놓고, 함께 웃을 수 있길 바라봅니다.


계절을 건너뛰어 겨울로 가고 있습니다.

건강 유의하세요.



지는 노을이 아쉽기만 한 10월의 화요일 저녁, 강소영 드림



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앙리 마티스 엮고 그림, 문예출판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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