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모를 때는 설렘, 두근거림인 줄 알았고 결혼을 결심할 즘에는 편안함이라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는 의리, 전우애라고 생각하는데 문득 궁금했다.
왜 나랑 결혼했어?
철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영희와 철수는 포스코본사 테라로사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자신만만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의 발걸음. 167cm,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비율이 자신 있던 미혼시절. 9cm 스틸레토힐과 빨간색 h라인 스커트를 입고 만났다. 철수는 가끔 별이에게 "엄마가 저런 새빨간 치마 입고 아빠랑 처음 만났어."라고 말한다. 철수는 개원한 치과의사, 영희는 광고대행사 AE였다.
사랑하니까, 그때 니 옆에 내가 없으면 큰일 날 것 같더라.
혼자서 바로서야 둘이서도 행복할 수 있다. 다만 누구나 언제든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철수는 연애, 결혼 도합 7년 중딱 2번 영희가 큰 산처럼 느껴진 적이 있다고 했다. 철수에게는 의지했던 순간이고 영희에게는물음표였다. '이런 남자를 믿어도 될까'를 꾹- 누르고, 몰라서 그렇겠지. 내가 알려주자 싶었다.기세등등하던 영희가 초반 강세였다면,철수가 영희의 마음에 큰 산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중반부터 서서히였다.
여행지 조식 불발 시무룩
연애 중, 무언가 착오로 다꼬인 첫 여행지 아침이었다. 풀 죽어 움츠린 어깨, 짜증 섞어 곱슬머리를 긁어댄다. 구시렁구시렁 짜증만 내며 앉아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꾹 참고 말한다.
나가서 햇빛보고 산책로 좀 걷자. 바다도 보고 파도소리 듣고 발도 담그고 그러다 보면 기분 좋아질 거야. 먹는 건 나가서 아무거나 먹으면 되지. 나가자 나가~!
철수는 인디핑크 반바지를 입었다. 그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영희기억 속 장면이 철수에게도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사랑이다
사랑의 이유 중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날의 사소한 일이 선명히 자리했다. 가끔 그때 생각나? 하고 철수가 이야기 꺼내면 영희는 분홍색 바지!! 를 외친다.
영희가 지질했던 시절
자취시절 변기통 막힌 것도 봤고, 밸브 잘못 건드려 물난리 나서 쥐새끼처럼 다 젖은 꼴도 보고, 머리 아픈 송사에 휘말린 것까지 모두 다 지켜봤다. 부모에게도 보이지 않은,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세상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을 만큼 무너져 내릴 때가 있었다.무교인 영희는 어둑한 밤 '마커스워쉽-거친 길 위를 걸어갈 때도'를 들으며 봉은사 불상을 자주 돌았다. '모든 신들 제발 다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며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걷다가.. 봉은사 불상 앞 계단에 걸터앉아 화려한 삼성동 불빛, 휘황찬란한 대형스크린, 절과 마주한 코엑스를 바라봤다. 앞으로 앞으로 잘난척하며 걸어가다 꼬꾸라지고는 어쩔 줄 모르는 그때의 영희는 고슴도치를 닮았다. 가시를 바짝 세웠지만 내면의 힘은 후들후들했고, 근육에 잔뜩 힘을 줘 움츠렸다. 그 시절 철수는 묵묵히 곁에 있었다.영희의 지릿함을 다 보았다. 서로의 지질한 모습까지 보듬어주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철수야, 영희야 너네 이선희의 인연 노래 아니? 젊을 때는 그게 뭐가 좋은지도 몰랐는데 요즘 노래 가사가 그렇게 와닿는다.
그렇게 정정하던 니 아버지 하루아침에 치매 오고 그래도 착한 치매라 귀여워. 다행이지. 그래도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그래.
너네도 살다가 서로가 미울 때가 있을 거야. 그때는 이 노래 한번 들어봐.
----------------------------- [이선희 - 인연 中]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이 사랑이 녹슬지 않도록 늘 닦아 비출게요.
취한 듯 만남은 짧았지만 빗장 열어 자리했죠 맺지 못한데도 후회하진 않죠 영원한 건 없으니까 운명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내 생애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다시 올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