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놀음 (제가)
내게 8년째 콩깍지가 껴 같이 살고 있는 그 사람을 나는 ‘깍지’라고 부른다. 열두 살이 어리지만 생일이 1월이라 다행히 띠동갑은 아니다. 깍지를 처음 만났을 때 내 나이는 37세, 깍지는 25세였다. 12살 어린 깍지는 5개월 전부터 더 이상 귀여운 짓을 하지 않는다. 5개월째 우울증 약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살을 염두에 두고 살았던 깍지의 감정을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동안 귀여운 짓을 한 이유는 조울증을 겪으면서 조증에 해당하는 행동들이었다.
깍지는 일부러 귀여운 척을 했는데 그게 진짜로 귀여웠다. 통화할 때나 대화할 때 혀 짧은 소리로 말을 하는 거다. '나 귀신꿍꼬또'처럼 말이다. '이뿌요 오늘 운동해또요?' 나 ‘이뿌요가 그대 짜나요 그더쵸?’ 일부러 아기처럼 흉내 내면서 말하는 그게 진짜 아기처럼 귀여운 거다.
서너 살 아기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양팔을 가슴 부분에 올리고 아기들이 화났을 때 할 것 같은 모습으로 훈계를 하거나, 오른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과장되게 흔들면서 뭔가를 따지고, 왼 집게손가락을 옆머리에 갖다 대며 곤란해하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그게 일부러 하는 것이기에 약간 밉상스러우면서도 귀여운 것이다.
깍지는 자주 창작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즉흥적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고 있으면 B병 맛 공연 보는 재미와 가짢아서 웃긴 재미가 합쳐져 배꼽을 잡아야 한다. 내 웃음소리에 반응해서인지, 아니면 자기 창작 공연이 자기가 봐도 웃겨서 그런지 몰라도 실금실금 웃으면서도 계속 집중해 공연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참, 니도 애먹는다' 생각이 들면서 기특해지는 것이다.
깍지는 조증 상태에서 자주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양팔을 엉덩이 위로 쳐올리고 재빠르게 주방에서 방으로 뛰어간다. 침대에 점프하기 전에 꼭 내가 자기를 잘 보고 있는지 빼꼼 쳐다보며 확인을 한다. 혹은 엉덩이를 삐쭉빼쭉거리고 양팔을 그것에 맞춰 흔들며 방에서 화장실로 가는데 꼭 화장실 들어가기 전에 내가 자기를 잘 봤는지 체크하는 것이다. 마치 '내가 금방 귀여운 짓을 했는데 잘 봤죠?'라고 말하는 눈빛으로. 그러면 나는 아주 잘 봤다는 뜻으로 '아 귀여워'를 연발하게 되는 것이다.
퇴근하고 오면 깍지는 가방을 내려놓자 말자 양팔을 내 허벅지에 두르고 천장 바로 아래까지 들어 올린다. 그 위에 올라가 있으면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다. 깍지가 지하철을 이용해 집에 올 때면 연산역까지 마중을 나간다. 반대로 깍지가 집에 있고 내가 볼일 보고 돌아올 때면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으로 깍지가 마중을 나온다. 멀리서 나를 발견한 깍지는 전속력으로 뛰어온다. 학교 마치고 정문을 나선 초등학생이 기다리고 있던 엄마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집에서 하던 대로 번쩍 들어 올린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이제 당분간은 볼 수 없다. 나는 깍지가 조증 행동들 이면에 울증의 감정이 바닥을 칠 때 어떤 상태인지를 가늠할 능력이 없다. 그저 옆에 있어줄 뿐이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으면 일부러 약속을 만들고, 웹툰을 보고 있으면 종알거리고 싶어도 참는다. 격하게 얼굴을 비비고 싶을 때는 조카 채민이가 동생 채령이에게 뭔가를 강제로 요구할 때 ‘채령이가 싫다고 하잖아!’하고 소리 지르던 못난 이모를 떠올린다.
깍지는 나를 만나기 전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류머티즘 레이노드라는 희귀병이었다. 부산대학교병원 의사가 6개월 밖에 못 산다고 했지만 6개월을 넘긴 후 나를 만났다. 약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이 없었다. 나는 한 번도 깍지의 머리카락을 본 적이 없다. 깍지가 머리카락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깍지는 어렸을 때 부모님, 여동생과 3평짜리 단칸방에 살았다. 자면서 뒤척이는 것이 불편했단다. 단칸방과 붙어있는 작은 떡볶이 가게에서 엄마가 돈을 벌었다. 하루는 아저씨 서너 명이 와서 떡볶이 그릇과 어묵 국물, 접시를 다 내동댕이 치고 가는 걸 봤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채를 빌려 쓴 모양이었다. 중학교 때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여동생과 깍지는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와 3년 동안 살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엄마와 살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편의점 야간 알바를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사장님은 본사에 반납해도 100원밖에 받지 못하는 삼각김밥을 깍지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은 급식비를 내지 못한 학생들을 앞으로 불러내 얼마 미납인지 금액을 말하고 급식을 이제 먹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이 부분에서는 화가 난다. 그 선생이란 작자가 가장 민감한 나이의 남학생에게 저지른 인권모독에 대해 말이다.
깍지는 테이프로 묶어놓은 1000원짜리 세 개 번들 건빵으로 아침, 점심, 저녁을 해결했다. 반친구들이 보지 않도록 어떻게 먹었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차마 깍지의 내용이 찢어지게 가난한 주인공을 영화로 표현하더라도 이토록 처참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스물네 살에 군대 가기 전까지 매일 2시간 자면서 새벽부터 닭 배달, 옷가게 박스 배달로 시작해 식당과 헬스장 등 하루에 네다섯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길거리에서 쓰러진 적은 두 번 정도다. 깨어나면 병원이었다. 안타깝게도 병원에서 나오려면 돈을 내야 했다. 군대를 다녀와서 건강은 더 나빠졌다. 조만간 깍지의 이야기를 책으로 한 권 내고 싶다. 까도 까도 끝이 없는 깍지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또 다른 깍지가 어딘가에서 열심히 자신의 짐을 끌어안고 살아내고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는 아직도 그런 아이들, 청년들이 많다. 보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다.
당분간 깍지의 창작 공연과 귀여운 공연을 볼 수 없다. 당분간 혀 짧은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당분간 번쩍 들어 올려질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깍지의 큰 눈을 매일 바라볼 수 있고, 손을 잡을 수 있고, 빡빡 민 머리에 뽀뽀할 수 있다. 조증 상태가 아닐 때 하는 깍지의 공연을 나는 맨 앞줄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