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부터 6월까지 극장에서 본 최신 작품들 중 가장 좋았던 10편.
올해 상반기에도 좋은 영화를 참 많이 만났습니다. 정식 극장 개봉작들 중에서도 멋진 작품들이 많았지만, 특히나 5월 전주국제영화제 그리고 6월 아랍영화제에서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나서, 가장 좋았던 10편을 고르는데 꽤나 애를 먹었습니다. 이하 10편은, 제가 올 상반기 동안 극장에서 관람한 119편의 영화들 중에서 최근에 공개된 영화들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미치광이 피에로’처럼 올해 극장에서 봤지만 최근에 제작된 영화가 아니거나, ‘원더풀 라이프’처럼 재개봉된 작품들은 제외했습니다. 좋은 작품들이 참 많아서,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 나빌 아우크의 ‘라지아’ 등을 뺄 수밖에 없었던 게 정말 아쉽네요. 그럼, 10위부터 시작합니다!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의 신작 ‘도블라토프’는 20세기에 실존했던 러시아 작가인 세르게이 도블라토프의 삶을 일주일 동안 따라간다. 영화에서 순차적으로 묘사되는 단 6일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마치 르포(reportage)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의 인생이 직접적으로 위기에 처한 한 주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영화의 톤은 상당히 낭만적으로 연출되어 있다. 실존적 위기에 직면한 낭만주의자들의 일주일이라 하면 적절할까. 이 영화는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날짜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극 중간에 삽입된) 주인공의 꿈과 연결시켜서 볼 때의 모호함이 이 영화의 연출적 지향점과 맞닿는다는 점에서 특히나 휼륭하다. 결국 ‘도블라토프’는 빛바랜 시대를 살았던 한 예술가의 단편적인 삶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영화적 대답일 것이다. (Довлатов, 2018)
픽사 스튜디오의 신작 ‘코코’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삶을 노래할 줄 아는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다. 멕시코의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삼아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매개하는 이 영화는 이야기를 관통하는 물질(사진)과 관념(기억) 사이의 활용이 탁월하고, 두 세계 사이를 오가기 위해 필요한 소재들(꽃잎과 신발) 사이의 관계가 인상적이다. ‘코코’에서 말하는 죽음은 삶이 끝났을 때가 아니라 모두에게 잊혀졌을 때 찾아오고, 이는 그렇기에 곧 집단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코’는 픽사 스튜디오의 가장 간절한 위령제다. 그 위령제에 필요한 의식이 있다면, 그건 신발로 꽃잎을 딛는 행위와 사진에 기억을 싣는 행위일 것이다. 오랜 부진을 딛고, 애니메이션 명가 픽사 스튜디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또 한 편 세상에 내놓았다. (Coco, 2017)
상처입은 이들의 이야기, 혹은 본 적 없는 세계를 겪어내는 이들의 보듬기. 사무엘 마오즈의 ‘폭스트롯’은 강렬한 드라마고, 특히나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이 절제와 은유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오프닝과 엔딩 부분에 마치 프롤로그처럼 놓인 두 장면을 제외한다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이 영화는, 뚜렷하게 구분된 이스라엘의 두 공간을 통해서 서로 겪은 적 없는 세계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다만, ‘폭스트롯’은 이렇게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소통의 부조리를 통해서 화합의 가능성을 점치는 기묘한 화술이 탁월한 작품이기도 하다. 소재의 명민한 활용이 돋보이면서도, (담배, 혹은 상처처럼)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서 감정을 담아내고 있기까지 하다. (פוֹקְסטְרוֹט, 2017)
루카 구아다니노는 영화 속에 관능적인 순간을 녹여낼 줄 아는 연출가이고, 신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도 그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현재의 사랑을 간절하게 끌어내려는 당김의 멜로다. 영화의 군데군데 편광 효과 혹은 필름 자국을 삽입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삶에 평생 동안 반복적으로 투사될 사랑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영화이기도 하다(극중 누군가는, 영화를 ‘필터’라 칭한다). 이 영화에서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는 것은 결국 수동적으로 결합된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습적인 관계를 능동적으로 뒤섞음으로써 이미 규정된 세상의 질서에 조용하게 항거하는 일이다. 결국,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행위를 통해 반짝였던 그 여름의 사랑을 영사(映射)하려 한다. (Call Me by Your Name, 2017)
튀니지의 카우테르 벤 하니아라는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음을 이 영화를 보면서 실감했다. 명명백백 다루어져야만 할 이야기를 다루는 날카로운 영화 만듦의 목적 의식이 인상적이고, 영화적 수단들을 활용하는 영화 만듦의 미학적 견지 역시 인상적이다. 튀니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경찰에 의한 성폭행 사건을 극화해서 만들어낸 이 영화는, 선택과 집중에 있어서 망설임이 없다. 관객들을 답답하고 잔인한 현실 속에 붙박아두려는 듯 단 9개의 롱테이크 쇼트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서는 두 주인공의 캐릭터가 복합적이고, 널리 알려진 동화의 제목을 비틀어 차용한 영화의 제목이 인상적이며, 베이지색 베일을 주인공이 두르는 방식의 변화에서 상징적으로 읽히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 지극히 영화적이다. 현대 튀니지 영화계에는 지난한 현실을 마주할 카우테르 벤 하니아의 용기가 있다. (على كف عفريت ,2017)
아녜스 바르다와 JR이 공동으로 연출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삶의 풍경화를 액자에 넣어 품은 것만 같은 소중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이 영화가 로드무비라는 형식을 빌어 담아내고자 했던 것은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하며 살아가는 얼굴들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촬영의 주체를 중심으로 보면 로드무비의 플롯을 지니는 이 영화는 카메라 밖의 관찰자로 초점을 옮겨가는 메타영화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벽에 붙이는 행위는, 그 자체로 흔적 혹은 순간을 마치 벽화처럼 아로새기는 행위를 통해서 세대, 성별, 나아가 개인의 다름을 표용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관찰자의 시선과 카메라의 순간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구성되는지에 달려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현실을 재구성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 중 하나가 있다. (Visages Villages, 2017)
미국의 근현대사를 파헤치던 폴 토마스 앤더슨이 극의 배경을 영국 런던으로 옮겨 만든 여덟 번째 장편 ‘팬텀 스레드’에는 시공간을 배회하는 유령과도 같은 오묘한 신비로움, 그리고 시공간을 기워내는 바느질과도 같은 우아한 매끄러움이 공존한다. 당연히, 이 영화는 드레스를 만드는 의상 디자이너 레이놀즈(다니엘 데이-루이스)와 그 소사회에 들어오게 된 알마(비키 크리엡스) 사이의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건 누가 주도권을 쥘 것인지의 역학관계에 대한 고찰인 동시에, 손에 완전히 넣기 위해서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이기도 하다. 이 영화 속의 애증에는 기이한 독성이 서려있는데, 그 독성은 결국 영화 속 ‘유령’의 유일성과 정당성이 부정당할 때 비로소 퍼져나간다. 대체 이런 기이한 멜로영화를 폴 토마스 앤더슨 말고 누가 만들 수 있단 말인가. (Phantom Thread, 2017)
기괴하고 아름답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극히 기예르모 델 토로스럽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는 델 토로가 천착하고 있는 크리처물에 대한 애정과 미소 냉전 시기의 역사가 멜로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된다. 이때 그의 작품들이 훌륭한 것은 영화라는 형식적 틀을 빌어 영화만이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환상을 펼쳐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근원’으로서의 물이 이야기 속의 다른 요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이며, 이를 위해 우리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농인인 엘라이자(샐리 호킨스)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그녀의 시점으로 치환해 볼 필요가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그토록 기괴하게, 허나 이토록 아름답게, 담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환상을 담아낸다. 물 속에서, 사랑을 담아, 영화를 통해. (The Shape of Water, 2017)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신작 ‘통행증’은 그가 이전에 만든 ‘바바라’와 ‘피닉스’를 섞어놓은 것만 같은 영화다. 독일군 점령기인 1940년대와 현대적 시간대를 기묘하게 섞어놓고 있는 이 영화는, 두 가지 시점의 이야기를 병치시키려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나는 인종 청소라는 명목으로 자행되었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대두되는 현대 이민자 사회의 이야기이다. 두 가지 시간대를 섞어버린 끝에 시공간을 초월한 것만 같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쟁 시대의) 역사와 (이민 사회의) 실상에 뿌리를 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영화적 상상력을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영화는 언제나 흥미로웠지만, 그의 영화세계는 ‘바바라’와 ‘피닉스’, 그리고 ‘통행증’으로 이어지는 2010년대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이한 것 같다. (Transit, 2018)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일상과 영화 사이에서,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자신만의 영화언어를 묵묵히 탐구해 온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러나 그가 만든 모든 영화(혹은 특히 ‘텐’)에서 드러나 있듯, 진심을 담아낼 수만 있다면 그 형식은 필름이든, 디지털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키아로스타미의 사후에 완성된 그의 유작 ‘24 프레임’은 이런 고민을 절실하게 담아낸 스물 네 조각의 사유다. 그 자체로 필름과 디지털의 혼재라고도 볼 수 있을 ‘24 프레임’ 속 24개의 단편들은 전체로서는 영화의 형식을 박제하고, 개별로서는 영화의 방향을 은유한다. 영화는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향하는가. 나는 ‘24 프레임’의 마지막 순간 영화라는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극점을 경험했다. 그렇게, 키아로스타미는 스스로 영화가 되어 자신의 마지막 프레임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갔다. (24 Frames,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