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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네피에 Dec 27. 2021

관리받지 못한 자

초단편

"밤새 게임하고 잠도 안 자고 어딜 나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내가 더 미칠 것 같아, 뭐 해준 게 있다고 맨날 이래라, 저래라야."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잖아. 내가 나 때문에 그래?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뭐라도 해야지."


'쾅'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났으면 했다. 짜증 나게도 우리 집 현관문은 항상 마지막쯤 가서 겸손해진다. '밥 먹어라, 일어나라, 일 알아봐라'하는 고나리질에 한방 시원하게 먹였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문은 관리가 안되어있어 쇳소리만 뱉어낸다. 엄마의 고나리질이 저리 심각한데도 정작 이 집구석에는 관리 안되어있는 것들 투성이다.


내가 이 지경이 된 건 다 못 배운 엄마 때문이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밥하고 빨래하는 것 밖에 없으면서, 뭐 자랑할 일이라고 밖에까지 나가서 밥하는 일을 하는 걸까. 반지하 낡은 현관문을 아무도 못 보는 곳으로 숨기고 싶었다. 대충 찍은 내 주민등록증처럼.


일일 알바 치고는 시급이 쏠쏠하단 생각에 금세 기분이 괜찮아졌다. 소개글이 수상쩍기는 했다. '이사, 2시간, 10만 원'. 지나치게 짧고 불친절한 소개였지만, 10만 원은 못 참지. 10만 원이면 점심 사 먹고 9만 원이나 남으니까,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신작 게임을 지르고도 2만 원이나 남는 돈. 치킨에 캔맥까지 하면 딱 떨어지는 각이었다.  


현장에 도착하자, 한 아저씨가 대충 인사하더니 장갑과 마대자루를 건넸다. 전부 마대자루에 담으란다. 까라면 까야지, 근데 무슨 이사가 이래.



"저기, 여기 이사하는 집 맞죠?"


마치 어제저녁에 밥을 먹다가 급한일이 생겨 외출한 사람의 집처럼, 아니 지금이라도 화장실 문을 열고 누가 나올 것 같은 집이었다. 안방의 작은 밥상 위에는 젓가락에 묻은 고춧가루와 반 정도 비워진 막걸리 병, 열려있는 반찬통 같은 것들이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밥을 먹다 말고, 반주를 하다 말고, 반찬통을 다 열어둔 채로 이사를 간단 말인가. 이사는 둘째 치고,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식으로 급하게 집 정리도 안 해놓고 이삿일 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걸까. 대략 얼마나 심각하고 위급한 상황이길래 그랬을까. 그 사람은 왜 이렇게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많은 것들을 남겨놓고 이 집을, 이곳을 떠났을까. 그때 누군가 이 집으로 들어왔다.


"저기 아저씨, 제가 찾아 달란 거 있었어요?"

"사모님, 끝날 때까지는 들어오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여기 일하시는 분은 모르고 하는 건데."


무언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때 현관문 앞에 놓인 신발 한 켤레가 보였다. 작고 오래된 아줌마들이 신는 신발. 나와 아저씨의 신발은 다 집안으로 앞꿈치가 향해 있는데, 그 신발만 바깥쪽을 향해 있었다.


저 신발 주인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간 게 아니었구나. 나는 시선을 마대자루에 고정하고, 손에 잡히는 데로 넣기 시작했다. 그런데 옷가지며, 이불이며, 모든 것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처음으로 그 관리자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아저씨, 이 액자는 어떻게."

"..."


"사모님, 이거 어머님 사진 액자인데 어떻게 할까요."


사모님이란 사람이 거친 손길로 물건을 뒤지다가, 다가와 사진액자를 쓱 쳐다보더니 마대자루에 집어던졌다. 그 순간 그 공간 모든 것들의 빛이 바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촛불이 분명 있었는데, 그래서 따뜻했는데, 방금 꺼진 것이 확실했다. 그 공간의 모든 관리받은 것들은 고개를 깊이 떨궜다.


10만 원을 받아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걷고 또 걸었다. 머릿속에는 자꾸 그 신발이 떠올랐다. 세상에 자기 신발을 못 신고 집에서 나온 사람이 또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이러다간 결국 집에 도착해버릴 것 같아 방향을 틀었다. 시끌벅적한 시장으로 들었갔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나도 모르게 물건을 집었다.


"이거 얼마예요?"

"그거 좀 비싼데, 8만 8천 원이에요. 여자 친구 줄 거면 젊은 사람들 쓰는 거, 더 싼 것도 있어요."

"그냥 주세요."



만 이천 원이 남았으니,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이면 딱 떨어지는 각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동네 순댓국집에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대낮에 먹어서 그런지, 소주 맛이 유난히 맹물 같았다. 엄마가 이런 모습을 보면 또 길길이 날뛰겠지. 근데 한 병을 다 비우는 동안 내가 여기 앉은지도 모르는 것 같다. 여기서도 밥하고, 집에 가서는 또 내 밥하고. 맨날 밥만 하려고 태어났나. 손은 부르터가지고. 이거 바르면 좀 괜찮아질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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