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자퇴 이후에 듣고 느끼고 알게 된 것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는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성공의 기준을 스스로 따져보기도 전에 일단 무엇인가를 시작하면 잘해야 하고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했다. 도중에 운에 의해 레이스에서 미끄러지고 중도하차 아여 아웃사이더라는 포지션으로 합법적인 정신 승리를 할 수 있는 명분을 얻기도 했었다. 어차피 한 번 다시 도전하기 어려운 처지가 된 마당에 본디 선한 사람이었던 척 낮은 곳에서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갱생하려는 연기를 했다. 지위, 학위, 권위가 없어도 무시당하지 않는 삶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어른이 되는 것이 내가 택할 수 있는 유망한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성취하고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한 순간의 실족의 결과는 가짜 신념과 소신을 지어내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고등학교 자퇴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의 기대 속에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자퇴 전까지 재학한 고등학교는 성적과 대학 입시가 우선으로 여겨지는 특수목적고등학교였다. 중학교 내신 성적과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통해서 입학한 이후에 강도 높은 학업 훈련을 통해 소위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한 장소였다. 자퇴를 결심한 이유는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 중 1시간을 덜어서 동네를 산책하고 싶었고, 1시간은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운동을 하고 싶었고, 1시간은 관심 있는 책을 보거나 좋아하는 것을 탐색하는 시간으로 가지고 싶었다. 하루에 3시간만 있다면 더 여유로울 것 같았지만, 졸업을 할 때까지 가질 수 없는 3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얼떨결에 준비를 하고 입학을 했지만, 하루에 3시간을 가지기 어렵다는 것은 사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중학생이었던 것이다.
평범한 3시간을 원했던 것과 다르게 자퇴를 하고 나서 맞이한 것은 낯설고 외로운 24시간이었다.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그, 스티브 잡스 등 미국 IT 기업의 리더들의 대학교 중퇴는 성공신화로 읽히는 듯하다.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재능과 혁신성을 바탕으로 남들이 도전하지 못하는 분야에 뛰어들 수 있게 된 계기를 중퇴라고 사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자퇴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갑지 않았다. 낙오, 편견, 차별, 결핍, 위로와 보호의 대상에 가둬짐을 경험했다. 아무리 스스로 정상적인 선택이었다고 믿고 확신해도 사회의 시선을 받다 보면 스스로 정체성에 대해 탐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전까지 맺어왔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립도 시도된다. 그리고 자퇴라는 사건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고 오히려 듣는 사람이 당황하지 않도록 대응을 해야 한다. 학교 생활에 대해서 조금은 회의감과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전부였고 특별한 자신감이나 반항적인 기질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지만, 자퇴한 사람이라는 덧씌임은 피할 수 없는 틀이었다.
아직 성인의 나이는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강요나 권유에서 자유를 얻어 스스로 현재와 미래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선택지의 폭이 넓어지는 점은 자퇴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왜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혼자서 알아보고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실리콘벨리 창업가들에게 빙의해서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IT기술을 배울 수도 있었고, 기술을 배우거나 직업훈련을 받아서 일찍 일을 시작할 수도 있었고, 다른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경우의 수도 있었다. 특별해지거나 위대해지기 위한 자의식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택한 길은 검정고시를 보고 나서 대학에 진학하는 과정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과도한 경쟁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뿐 대학에서 만 경험할 수 있는 학문과 교양과 문화적 활동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학을 다니면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나 권위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싶다거나 영향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하루에 3시간 정도는 나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며 일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일상을 상상했다. 그것이 자퇴를 하고 나서 고민했던 시간들 속에 내린 결론이었다.
미래에 되고 싶은 모습에 대해 스스로 정하는 것도 별개로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겪는 문제는 관계를 맺어야 할 때 발생했다. 가깝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자퇴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못했으며 비정상에 속하는 부류라는 판단을 쉽게 내리곤 했다. 누군가를 새롭게 알게 되어 관계를 맺으며 펼치는 대화 속에 출신 고등학교와 지역을 말하는 순간부터 단단한 선입견을 제공하고 시작하는 것이었다. 직접 겪으며 함께해서 편견이 허물어지고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일부러 사람들에게 비정상도 아니며 하자가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인식하게 만들고 인정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는 항변이었다. 필요한 것보다 더 성실한 모습을 보여줘서 자퇴라는 선택이 포기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책임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동료들과 협업을 해야 할 때는 남을 배려하고 신뢰를 제공해서 독선적이거나 모난 본능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어느덧 출신 고등학교보다는 현재의 모습으로 평판이 생기고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인성이 관계를 맺는 데 더 중요한 시기가 도래했을 때의 모습에는 남을 위해 헌신하고 성실한 자아가 크게 부각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회가 만드는 자퇴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지우고 정상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사투는 사실 자퇴할 당시에 품었던 소망과는 거리가 있었다. 일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일상보다는 몇 시간이 걸리든 인정을 받아내고 편견을 뒤집고 더 나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잘 살고 있고 행복한 환경을 갖추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던 시점에서는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에 대해 별 다른 호불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느덧 사회가 자신을 정상인이지 비정상인지 판가름하는 것에 대한 신경보다는 자퇴한 사람에 대해 혹독한 경험을 안겨준 정체모를 안개에서 저항을 하고 있었다. 출신 학교나 배경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서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공정한 경쟁을 거쳐서 만든 성과와 성취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명예에 걸맞은 타이틀을 구하는 데 혈안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감각하려 했다. 자수성가나 근사한 위치에 오르면 사람들은 자퇴한 사람들에 대해서 더 나은 인식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신뢰할 수 있는 동료로 여겨지고 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사회에 공헌을 할 수 있는 이타적인 비즈니스를 만들고 관련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문화와 교양에 대해서 해박한 사람이 되면 내 삶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만에, 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이러한 오기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나 지금이나 경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정의로운 것인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누구에게는 평화와 행복이 되고, 누구에게는 전쟁과 불행이 된다. 불균형과 양극화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끊임없이 관련 시장과 논리에 모여드는 인파가 불어나는 현상은 복잡하게 보일 뿐이다. 그 안에서 처음 내렸던 선택은 특수목적고등학교에서 이탈하는 것이었다. 불리하게 작용되는 위치에 놓이는 것에 대해 불안한 감정으로 다시 향한 곳은 또 다른 경쟁의 장이었다. 한 때는 예술, 종교, 정치, 역사를 통해서 이러한 불편한 지점들에 대해 비판하거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데 깊게 가담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자퇴를 한 삶이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무시받고 존중받지 못한 계층과 개인들에 대해 공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 삶이 더 밝아지고 나아지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하게 사회적 성공에 도달해야겠다는 마음이 깊게 내려 있었다. 이러한 양가적인 마음은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고 그다음 단계에 뛰어들게 될 때에는 항상 자기모순에 빠지고 그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선택한 자퇴는 오히려 인정을 받기 위해 더 노예 같은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마음에 위안을 얻고자 보기 시작했던 영화는 전문성을 갖추고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을 낳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영혼을 들여다보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팔리기 위한 수단으로 가다듬어져야 했다. 호기심과 궁금증을 충족하기 위해 읽었던 책은 지식이라는 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 자산으로 여겨졌다. 사람들과의 추억을 담을 수 있기에 좋아했던 영상 편집은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는 기술이 되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친구들끼리 시작한 콘텐츠 기획 모임은 성공을 위해 질주해야 하는 경주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좋은 영화를 보고 간직하고 싶은 의도에서 공부한 스토리텔링은 더 효율적으로 성과를 내기 위한 화법으로 사용되었다. 세상의 진실을 마주하고 싶어서 전공한 인문학은 많은 보수를 불러오지 못한다는 이유로 폐기했었다. 결국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내가 느낀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창업과 업무를 맡았을 때는 또 똑같은 문제를 답습하는 방식의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짜 신념과 소신을 지어내는 선택의 연속으로 인한 헛발질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 극렬한 대조를 확인할 수 있는 거울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 모두를 경험하고 나서 그 지위나 영향력의 한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살아오는 삶의 기억과 이야기와 맺고 사라지지 않은 관계들이었다. 목적이 무엇이었든 무시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몰입해서 성과를 내고자 열을 올려서 남은 건 그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시다발적으로 변화와 성장을 겪지만, 성공할 수 있는 곳으로 도달할 수 있는 동시에 이전에 시도하지 못했던 나의 안일한 과거보다 더 적극성을 띈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손뼉 쳐 주었는지를 떠나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 사이에 넣은 집중과 인내력과 자기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매듭을 지을 때마다 얻을 수 있었다. 자퇴한 사람으로서 나의 뿌리를 기억하고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다짐은 사실 존재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장치에 불과했다.
그래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할 때면 아직 극복하지 못한 못난 모습이나 바꿔나가야 할 부조리나 더 나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리곤 했다. 왜냐하면 나의 출발이 차별받고 고통받았던 존재라고 항상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해결하고자 했던 진짜 나의 문제는 어느새 문제가 해당하지 않았다. 나의 처음은 자퇴생이라는 본질이 아니라 하루에 3시간 정도 여유를 가지고 산책하고 친구들과 운동을 하고 관심 있는 책을 읽고 싶어 했던 가치를 지닌 사람이었다. 하루 3시간을 가지기 위해 불철주야 학업에 매진해야 했던 학교가 조금 걸림돌이 되었을 뿐, 그 후로 3시간을 가질 수 없게 만든 장본인은 나 자신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자신에게 부여하고 싶은 건 적당한 강도의 업무와 그 외 시간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여유 있는 삶이다. 그 이상으로 큰 뜻을 이루거나 더 다채로운 소비를 늘리고 싶다는 건 매체들에 의해 주입된 생각이다. 그래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다시 물어본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추억과 즐거움과 여정을 빈곤하지 않게 가꾸고 자유롭게 하루에 3시간을 사용하는 것뿐이라고 답할 수 있다.
삶을 이어가다 보면 강력하게 부인하고 싶었던 과도한 경쟁에 다시 한번 휩쓸리거나 노예처럼 물질적인 가치들을 숭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인정해야 했던 것은 그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사회는 낯선 존재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고 비정상이라고 여겨지는 판단에 대해서는 팔짱을 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한 개인의 절대적 본성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어야 한다. 편견과 고정관념 안에 갇혀있던 덕분에 그 틀을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행동으로 대체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해 나갈 수 있는 내 것이 의도치 않게 발견되었다. 사회와 나 자신까지도 스스로를 속이면서 원하는 것의 이름을 바꾸고 새로 지어내고 목적으로 삼도록 한다. 중요한 것은 미로 같은 수수께끼 말장난과 이벤트들 속에서 열쇠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자유롭게 그 안을 열고 닫고 넘나들면서 열쇠의 주인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이 토대라고 생각되는 때에도 항상 주머니 속에 열쇠를 분실하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만 내가 나에게 부여하고 싶은 것을 되찾을 수 있다. 그래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열쇠를 들고 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