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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Sep 21. 2023

아름답다, 우정과 자연의 긴 풍경들!

<여덟 개의 산>


내가 돌아갈 곳과 나를 기다려주는 이가 있다는 건 정말이지 큰 축복일 것이다. 하지만 '돌아갈 곳'과 '기다려주는 이'는 모두 나의 관점에서만 살펴본 표현일 뿐. 그걸 상대 관점으로 바꿔본다면, 누군가가 돌아오고 또 그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상대 관점에서의) 내가 항상 고정된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게 흙과 바위의 힘을 빌려 말하면 산이 될 것이지만, 물에 비유하면 웅덩이 속 고인 물이 된다. 고로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존재는 어쩔 수 없이 고일 것이다. 


피에트로를 기다리던 산자락 집의 브루노가 항상 그랬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브루노가 매일 매순간 피에트로의 귀환만을 기다리며 꽃받침한채 하늘만 잔뜩 올려다보고 있진 않았겠지. 브루노도 나름대로 그만의 인생을 살아냈다. 집을 지었고, 가족을 이뤘고, 사업을 꾸렸다.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피에트로가 세상 바깥에서 들고 온 '여덟 개의 산' 이야기처럼, 브루노는 하나의 산 정상에서만 일생을 보낸 사람이다. 여덟 개의 산 모두를 고루 돌아본 피에트로 입장에서 브루노는 어쩔 수 없이 고인 물이었을 것. 물론 그 표현 안에는 긍정과 부정 둘 다 들어있는 것이고. 


자기보다 자신의 아버지와 훨씬 더 가깝게 지냈던 브루노를 피에트로는 살짝 질투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일종의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라 본다. 그의 부모님이 물심양면 지원해 함께 도시로 가자고 제안했던 브루노를, 피에트로는 데려가고 싶지 않았던 것. 물론 그 감정 역시 복합적이었을 것이다. 어렸던 그의 말마따나 시골소년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브루노에게 도시라는 더럽고 흉측한 공간을 소개해주고 싶지 않아서도 분명 있었을 것이고,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질투심도 있었겠지. 그리고 피에트로가 계속 반대의사를 표명하긴 했지만 정작 브루노의 도시 생활을 결정적으로 훼방놓은 건 그의 술주정뱅이 아버지였으니 마냥 피에트로의 탓이었다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무한한 가능성의 날개를 갖고 있었음에도 그게 모조리 다 꺾여버린채 산자락에 고여 인생 전부를 보내게 된 브루노에게 분명 죄책감이 있었을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브루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피에트로를 따라 도시로 갔더라면. 학교에 가 공부를 했더라면. 피에트로의 아버지와 더 좋은 시간들을 함께 보냈더라면 말이다. 브루노는 모든 걸 다 구분해내고 구별할 줄 아는 아이였다. 피에트로에게 낙엽송을 비롯한 나무의 종류들을 설명해줬고, 사투리 여러개를 가르쳐주었으며, 이 산과 저 산의 차이점을 말해줬었다. 하지만 끝내 산자락에 고여버린 아이는 모든 산과 그 정상들을 그냥 하나의 이름으로 퉁쳐버리던 그의 삼촌을 닮아가, 결국엔 그마저도 '산사람'이란 정체성 하나로만 고정되어버리고 만다. 봄이나 여름이나 무슨 차이냐고 되물어 따지던 브루노 말년의 모습이 그래서 섧었다. 


그렇게 산사람의 운명에 귀결되어버린 브루노. 그리고 그렇게 천장에 구멍 뚫린채 천천히 허물어져간 그들의 집. 그러나 끝은 그랬더라도, 분명히 존재했던 두 사람의 우정과 그를 품어준 대자연의 풍광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우정과 자연의 유장한 아름다움. <여덟 개의 산>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관객들 마음에 큰 산을 하나씩 심어주는 영화다. 


<여덟 개의 산> / 샤를로트 반더히르미 & 펠릭스 반 그뢰닝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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