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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Jan 29. 2024

삶과 이데올로기 사이 어딘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어느 나라에나 비극의 역사는 있는 법. 그중에서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특히나 20세기 초반 아일랜드의 투쟁사에 더 마음이 가는 건 그들의 그 시절이 우리들의 그 시절과 매우 비슷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옛날 우리가 일본에 저항했듯이 그들은 영국에 저항했고, 이후 우리가 갈라져 동포들끼리 총칼을 겨누게 됐던 것처럼 그들 역시도 안에서 갈라져 형제들끼리 결국 피를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정치'란 건 우리네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그걸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극의 역사를 마주할 때면 '정치'나 그에 깃든 '사상' 따위 보다는 우리네 '삶'이 조금이라도 더 중요하게 여겨져야 맞는 것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영화내내 같은 편에 서서 서로를 돌보며 함께 투쟁했던 테디와 데미언 형제. 이후 영국이 물러간 뒤에는 각자만의 노선으로 첨예하게 갈라져 끝내 서로의 편에 총구를 겨누고 만다. 물론 그들 각자의 주장 모두 저마다의 의미가 있고 또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 이상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로 물들어간 테디의 안정을 추구하는 방식 역시 이해가 되고, 반대로 현실주의자에서 이상주의자로 변모한 데미언이 외쳐낸 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적 방식 또한 일견 공감이 간다.


하지만 결국 이는 동포이자 형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편이었던 두 사람의 극렬한 대립으로 이어지고 결국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눈물로 처형하는 모습으로써 마침표를 찍는다. 바로 그랬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치와 사상 등의 이데올로기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역시나 그럼에도 조금 더 우선시되어야 하는 건 그 안의 인간들 아니었을까. 어쩌면 비극의 역사라는 건 종종 삶보다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비극 안에서도 끝까지 인상적이었던 건, 테디와 데미언 두 사람이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최종적으로 한 선택이었다. 테디는 그게 언제나 자신을 따랐고 또 그를 위해 언제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동생이었다 할지라도, 스스로가 믿는 대의를 위해 데미언의 처형을 주관했다. 심지어 피하지 않고 자신이 그 총살형에 스스로 구령을 넣기까지. 그리고 데미언 역시, 자신이 믿고 행했던 바대로 친분에 관계 없이 조직내 끄나풀을 단죄했고 또 바로 그랬기에 스스로 또한 아무 것도 불지 않으며 처형을 받아들였다. 나는 분명 앞선 단락에서 '이데올로기 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라 말했다. 내 가치관은 그것이기에, 어쩌면 그래서 테디와 데미언이 더 대단해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삶보다 이데올로기, 자신이 믿고 행했던 그 가치를 먼저 두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되짚어 본다. 어쩌면 비극의 역사라는 건 종종 삶보다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리고 어쩌면 그 역사 속 영웅이라는 것도 자신의 삶보다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덩달아 들었다. 비극의 역사에서 숱한 영웅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리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 켄 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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