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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Jan 29. 2024

진짜 좋은 인생 경험이란?

<시민덕희>

남편없이 어린 두 아이를 홀로 키우기 위해 세탁 공장에서 자신의 삶 전부를 써버리고 있던 2016년의 덕희. 심지어 최근엔 화재로 인해 집이 불타 어린 오누이도 공장 한 켠에서 재우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당시의 최신 유행이 도래하나니... 바로 2010년대 들어 활기를 띈 보이스피싱의 갈고리에 그녀가 걸려든 것. 잘못된 전화에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그녀는 그나마 갖고 있던 전재산마저 모조리 잃게 되고, 결국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고야 만다. 


강간과 살인을 제외해도 세상엔 정말이지 여러 종류의 범죄들이 있고, 그 모두가 다 나쁘다. 그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굳이 우열을 가리자면, 보이스피싱이야말로 진정 비열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대상이 주로 일반적인 우리네 소시민이기 때문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 깊은 곳 누군가에 대한 걱정 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그 범죄의 미끼로 삼았다는 게 비열함의 주요 사유다. 그리고 특정 범죄가 차라리 낫다며 조장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대상으로 나쁜 짓을 하려면 적어도 그 피해 상대의 얼굴과 눈은 마주쳐야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물론 범죄자들 사이에서 인지상정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애초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시민덕희>는 우리네가 품을 수 있는 그 무한한 공감대 덕을 많이 보는 영화다. <테이큰>이나 <존 윅> 속 복수처럼 누군가가 죽네 사네 하는 문제까진 가지 않지만, 그럼에도 보이스피싱에 대한 그 공감대가 우리네에겐 이미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시민덕희>의 그 권선징악은 뻔하되 일정부분 통쾌하게 느껴진다. 다만 당연히 단점도 있는 영화이긴 하다. 중국 칭다오에서 활약하는 주요 인물이 주인공 덕희를 제외해도 벌써 세 명이나 되는데, 그 각자의 캐릭터를 제대로 살려내지는 못한 것 같단 점. 그리고 잔인무도한 영화의 최종 악역으로 이무생을 캐스팅한다는 독특한 선택을 했음에도 그걸 잘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 여기에 전체적인 이야기가 전형적인 걸 넘어 그 안의 각본 구조까지 훤히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 등등이 아쉬운 부분들이다. 


하지만 이런 여러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인공에게 100% 이입되어 있는 나로서는 극중 형사가 무심하게 내지른 말에 덕희마냥 서운할 수 밖에 없었다. "이참에 좋은 인생 경험했다 생각하세요"라는 그 말 말이다. 물론 그 말은 발화자의 진심 농도에 따라 정말로 좋은 말이 될 수도 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이를 통해 다음엔 당하지 말자-란 교훈을 얻지 않았냐는 낙관론. 허나 무엇보다 극중 그 형사의 말투나 태도가 그같은 낙관론과는 거리가 멀었고, 게다가 어차피 총책을 잡을 순 없으니 그냥 포기하자는 합리화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덕희처럼 나도 속상하고 서운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 


당연히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이를 통해 다음엔 당하지 말자'란 교훈은 귀하고 소중하다. 그렇지만 나는 덕희에게 이리 말해주고 싶었다. 진짜 좋은 인생 경험은 당신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라는 거라고. 모두가 포기하고, 손을 놓고, 체념하고, 달관하며, 겨우겨우 합리화 하기에 바빴던 그 때. 바로 그 때에도 당신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채 직접 어색한 타국으로 넘어가 걷고 달리고 뛰어오르지 않았냐고. 진짜 좋은 인생 경험이라는 건 무릇, 그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덕희에게 그리 말해주고 싶다. 


<시민덕희> / 박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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