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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에게.
우연이란 건 세상에 없어요.
그리고 언젠가 하지도 알게 될 일이었어요.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에요.
차라리 일찍 이렇게 된 걸 감사히 생각해요.
이렇게 말하는 날 모질다 하겠지만 당신을 납득시킬 말이 없어요.
내가 당신에게
당신은 젊기 때문에 해결책과 해명에 매달리는 거라 말하더라도 화내지 말아 줘요.
언젠가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예요.
그날이 오면 그곳에서 당신을 반겨줄게요
영원한 일출처럼 우리 앞에 펼쳐진 삶을
하지만 그때까진 만나지 않기로 해요.
난 할 일이 많아요. 당신은 훨씬 많겠죠.
당신의 행복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어요.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에요.
당신을 놓아줄게요.
영화 <캐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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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영화를 시간이 흘러 다시 보면 달리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땐 몰랐는데 이제야 보이는 배우의 표정, 세월의 흐름이 묻어야 비로소 이해되는 대사 같은 것.
<캐롤>이 처음 개봉했던 8년 전에는 강렬한 '캐롤(케이트 블란쳇)'만 남았었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이듯 우아하고 간결하게 말하는 캐롤의 말투, 테레즈(루니 마라)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과 눈빛, 그리고 가장 화려하지만 왠지 차가워 보이는 붉은색 옷과 립스틱 색. 거의 캐롤이 주인공으로서 혼자 이끌어가는 영화라고 여겼다.
'캐롤'만 빛나던 영화를 다시 보니 이제야 테레즈의 눈빛과,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둘 사이의 감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었음이 이제야 와닿는다. 몇 년 후에는 또 어떤 감정으로 다가올까.
<캐롤>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두 시간여 동안 아주 촘촘하고 섬세하게 보여준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이 거부할 수 없는 감정에 서로에게 이끌리는 과정은 삐걱거리지 않고 자연스럽다. 마치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캐롤은 테레즈에게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테레즈는 무작정 캐롤의 여행길에 따라나서고 그녀를 붙잡으며 정신 차리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이보다 더 머리가 맑았던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사랑이 맞다는 확신이 들 때 사람은 거칠 게 없어진다. 당신을 몰랐던 이전의 삶은 전생이 되어버리고, 그 사람이 나타남으로써 모든 삶의 의미가 바뀌는 전환점.
벼락같은 만남은 한동안 주변을 온통 환하게 만든다. 하지만 강렬할수록 그 파장이 너무 커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땅까지 흔들리게 한다. 사랑도 곧 현실에서 하는 거니까, 서로를 사랑하지만 각자 잃으면 안 되는 것들이 꼭 하나씩은 있으니까. 캐롤에게 딸 '린디'가 그랬듯이.
1950년대에 두 여인의 사랑은 금기이고, 이혼 소송 중인 남편은 캐롤에게 '윤리'를 운운하며 그녀의 사생활을 침해한다. 그런 상황에 캐롤은 엄마로서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는다. 무너지지 않고,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테레즈 곁을 잠시 떠나는 선택을 한다. 모든 게 '자신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라며 자책하는 테레즈가 가엾게만 느껴졌었는데 아니다. 캐롤에 의해 혼란스럽던 자신의 자아를 찾고 캐롤을 그리워하는 테레즈는 이전의 그녀와는 다른 사람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 눈빛이 더욱 빛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모든 건 가짜와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의 재회. 먼발치에서 캐롤을 관찰하던 장난감 가게에서의 테레즈가 아닌, 용기내어 다시 한번 손을 내민 캐롤에게 곧고 확실한 눈빛으로 답하며 다가가는 테레즈의 모습이 완벽한 엔딩을 만들었다.
"하지만 날 부정하며 산다면 린디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car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