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의 배경이 된 정권 말년에 대통령에 대한 사건들로 뉴스를 도배할 무렵, 평생 내 입에서 나올 일은 없을 것 같았던 욕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뱉었다. 그조차도 '미친...' 이 정도로. 하지만 이 소설 속 '마지막 메르스 환자'로 남아 긴 시간을 혼자 싸워내는 석주와 그 아내 영아를 대하는 질병관리본부의 탁상행정에 다시 욕을 뱉었다.
ㅆㅂ... 눈물을 철철 흘리며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절로.
첫꽃송이, 동화, 석주를 실제 존재하는 사람인 것 마냥 응원했다. 저녁에 귀가한 남편에게 "우리 석주 괜찮아지겠지? 괜찮겠지?"라는 말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상황이 오래 지나지 않은 탓인지, 더 잘 몰입되기도 했지만 내가 잘 못 인식했던 것들도 더 잘 보였다. 메르스 때와 비교해서 다른 상황들도 있었지만, 그때도 나는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더 이상 바이러스에 자유로운 세상이 아니지만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 준 소설이다.
이야기에 몰입이 되기도 했지만, 읽는 내내 작가는 도대체 어디까지 조사하고 공부한 건지 놀랍기도 했다. 소설을 마무리하고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어렴풋이나마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겠구나 싶었다. 문학은 가난한 자 아픈 자의 편이라는 작가의 말이 이렇게 소설로 표현된 것이구나 싶었다. 메르스 바이러스 안에 갇혔던 피해자들의 소리를 제대로 듣고 세상을 향해 제대로 소리를 내려고 온 힘을 쏟은 작가의 마음이 읽혔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다시 첫 장을 열어보았다.
29년 후, 우람에게.
작가는 석주가 투병할 당시 네 살이었던 우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을지 다시 가만히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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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꽃송이 씨! 조금만 더 힘을 내 주세요. 당신이 살고 또 막내 이모부를 비롯한 친척들이 살아야, 화목이 결코 죄가 아니란 게 증명됩니다. 난 꼭 당신을 살릴 겁니다." p.200
"왜 그런 문장을 썼는지는 알겠습니다. 2차 3차 4차로 전염이 확장되니까, 어떤 환자는 전염당한 사람이면서 전염시킨 사람이 되기도 했죠. 전염력이 강한 환자를 '슈퍼 전파자'라고 한동안 부르기도 했고요. 제 생각엔 메르스 환자는 어떤 경우에도 가해자가 아니란 겁니다. 메르스에 감염되었느냐 감염시켰느냐만 놓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르는 건 지나치게 단순한 구분입니다. 환자가 메르스에 감염되고 또 감염시킬 수밖에 없었던 병원의 관습과 운영 체계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중략) 메르스 환자를 전부 피해자로 둬야, 그들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를 거론할 수 있고, 법과 제도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습니다..." p.381
보호 장구 없는, 완전한 포옹이었다. p.371
"... 전염병이 김석주 씨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게 아냐. 메르스란 병에 걸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하는, 세월호란 배에 타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안일하고 허약한 자기합리화가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중이지. 그렇게 비겁한 다행에 안주하면 결국 언젠가 우리도 외롭게 불행을 만나게 돼. 무리해서라도 지금 김석주 씨를 끌어안아야 해..." p.521
삶과 죽음을 재수나 운에 맡겨선 안 된다. 그 전염병에 안 걸렸기 때문에, 그 배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행운'은 얼마나 허약하고 어리석은가. 게다가 도탄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배제하려 든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마션>의 감동은 공동체가 그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경제적 손실이나 성공 가능성 따위로 바꿔치기 하지 않는 원칙으로부터 온다. p.631 (작가의 말)
메르스는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중략) 메르스가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고 아직도 그 지옥에 갇혀 있다고 절규하는 이들을 외면한 채, 감히 '메르스는 끝났다'고 선언하지 않는 삶이다. p.633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