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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음 단상

가짜 자존감이 답이라니

우울에서 벗어나는 법

by 툇마루


간헐적으로 우울한 시기가 오는 편이다. 처음엔 또 왜 이러나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에는 다행히 기간이 길지 않았고, 우연한 기회에 정확한 이유도 알게 되었다. 큰 행운이었다.


우울 속에 있는 동안 가장 힘든 것이 무기력이 아닌가 싶다. 숨 쉬는 것처럼 해오던 것들도 부담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번엔 무기력하게 늘어져 짧은 영상들을 보는 시간이 길었다.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쇼츠를 선택하면서 이제는 정말 중독이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우울이 자주 찾아오면 미디어 중독에 빠지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자주 찾아서 보던 영상 중에 "진짜 자존감"과 "가짜 자존감"에 대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전문가의 설명이 아주 탁월하거나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든 타이밍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에겐 그날 그 상황에서 만난 "가짜 자존감"이라는 단어와 그 설명이 제대로 만난 타이밍이었다.


스스로 판단하기로 나는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고 아이가 크면서 두 사람이 나에게 주는 인정과 사랑이 자존감을 세우는 단단한 발판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 위에 쌓아가는 자존감이 건강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날 그 영상 덕분에 알게 되었다. 영상 속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진짜 자존감은 타인이 없어도 스스로 가질 수 있는 자존감이고, 반대로 타인의 인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가짜 자존감이라는 것이었다. 아이이게 이 이야기를 건넸을 때 아이는 그 둘을 때어놓을 수 있는 건지, 모든 사람들이 그 둘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 둘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인의 인정에 많이 기대어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나를 꺼내어 자주 저울 위에 올려 두었던 것 같다. 한 발짝 떨어진 저울에 올려두고 내가 나를 평가하기도 하고 남이 나를 평가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가능하다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착한 척, 이해하는 척했던 적도 있었다. 배움에 대한 마음을 늘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것을 꺼내어 보이게 두고 "넌 늘 뭔가를 배우고 있더라" 하는 칭찬 듣기를 좋아했다. 생각해 보면 순순한 마음으로 시작한 것들도 어느새 칭찬받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조화롭지 못하게 쌓여서 가짜 자존감을 만들어왔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어드는 상황이 생기면서 자주 우울했던 것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하게 되었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저울에 올려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끝없이 흔들리는 저울에 기어이 올랐던 나를 인정했다. 인정하는 만큼 길었던 저울의 지렛대가 뭉텅 잘려나갔다. 지렛대의 길이가 줄어드는 만큼 흔들림도 줄어들었다. 흔들림이 줄어드는 만큼 우울감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울 아래로 내려올 수 있을 것 같다는 긍정적인 생각도 들었다. 머물렀던 공간이 환해지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떠올려보면 지난 우울에서 찾았던 답은, 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인간의 모습이 내게도 적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던 때였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우울에서 벗어나는 답이 되었다. 그때는 오래 많이 힘들었다. 이렇게저렇게 답을 찾는 시간들을 지나면서 우울을 극복하는 실력도 쌓이는 건지, 나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고 있어서인지(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번엔 그때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가짜 자존감이라는 답을 찾고 나서 "남이 원하는 내가 아닌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그 과정에서 "남들이 만들어주는 자존감이 아닌 내가 나를 세워가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울에서 내려오기였다. 이것을 알기까지는 길었지만 막상 내려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남들 눈에 좋은 것들은 리스트에서 모두 지운다. 미련 없이 싹.

내 마음에 좋은 것들만 리스트에 남기고 다시 채워간다.

당분간은 잔잔할 것 같다. 호수가 아니어도 세숫대야에 담긴 잔잔함이어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꽤 오래.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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