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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Jul 03. 2024

100억짜리 아파트에 살아요

 어릴 적 형, 누나와 인형 놀이를 한 적이 있다. 진짜 인형은 없었다. 인형 살 돈은 없었으니까. 누나가 흰 종이에 캐릭터를 그리면 그걸 오려서 상황극을 했다. 누나와 형은 엄마와 아빠, 아들과 딸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나는 한 가지 배역만 맡았다. 악역이나 아역 전문? 아니다. 하숙생이었다. 잠자고 밥 먹는 이웃집 하숙생. 같이 어울려 제대로 놀기엔 내가 너무 어려 누나가 배정한 역할이었다. 같이 놀고 싶어 나는 늘 누나와 형의 놀이에 갑자기 끼어들곤 했다.


"밥 주세요! 배가 고파요."

"햇살아, 니 역할은 일단 잠자는 것부터 시작이야."         

"에이!.. 치.."


 누나의 말에 시무룩해하며 책을 쌓아 만든 작은 집 안에 하숙생 인형을 눕혔다. 작은 집에 기다란 인형을 밀어 넣으니 웅크려 자는 것처럼 보였다. 웅크려 잠들어야 했던 인형처럼 내 인생에도 불편하게 잠든 날이 많았다. 남의 집 살이를 많이 해서 그랬던 걸까.    




 어릴 땐 자주 이사를 다녔던 기억이 있다. 문구점이 유난히 많았던 초등학교 근처의 어느 집, 엄마가 잠깐 떡볶이 장사를 해서 홀이 있던 집, 집 뒤에 산이 있던 집, 커다란 방 하나에 다락방이 있던 집. 월세 살이를 하며 거쳐갔던 집들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 때 아빠와 엄마는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우리 집이라니! 화려한 집을 기대했지만 무슨 옛날 여인숙 같았다. 재래식 화장실, 방은 여러 개였지만 모두 분리되어 있었고, 창호지 바른 나무 문 하나 열면 기다란 마당이 보이는 집이었다. 집이 허름해 보여 시무룩한 얼굴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집이 왜 이렇게 낡았어? 방은 왜 이상하게 떨어져 있어?"    

"걱정 마. 수리하면 깨끗해질 거야. 너희들 공부시키려면 방이 많아야 해."


 엄마 말대로 집수리가 이루어졌다. 재래식 화장실 바닥은 타일로 교체했고, 벽지와 장판, 낡은 기왓장 모두 새것으로 바꿨다. 수리한 뒤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오고 갔다. 집에 이사 온  4년 후 엄마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 짬짬이 이루어지던 집수리도 중단되었고 이사 오는 이웃도 점점 줄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집은 병들어 갔다.

똑. 똑. 똑.

천장에 비부터 새기 시작했다. 책꽂이에 꽂힌 책이 축축이 젖었다. 마르고 나면 책 상단이 구깃구깃해졌다. 썰물이 남긴 해변의 모래처럼 말이다. 책이 구겨지니 공부하기가 더 싫어졌다. (원래 안 했으면서 핑계도 좋다.)

     

"으악! 꺄약!"

여름이 되면 가족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집 앞에 목욕탕이 생기며 습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바퀴벌레 출몰이 너무 잦았다. 나는 가족들을 위해 방역업체 직원처럼 이 징그러운 녀석과 사투를 벌였다.


"햇살아! 벽에 여름친구.. 빨리 없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퀴 벌레를 '여름 친구'라 부르던 형이 나를 부를 땐 짜증이 났다.

"형도 남자잖아! 직접 잡아라. 좀!"

형에게 짜증 부리며 여름 친구에게 낡은 연습장을 대충 던졌는데 단박에 죽어 버렸다. 

"이야~ 이제 예술적으로 죽이네"

이상한 말로 자주 염장을 지르던 형. 여름만 되면 바퀴벌레 보다 형이 더 싫었던 이유다. 이 징그러운 여름친구 말고 가끔 등장하는 톰과 제리(도둑고양이와 쥐)도 있었다. 이 녀석들도 나를 괴롭히긴 마찬가지였다. 아휴...


 병도 초기에 잡아야 하듯 집도 이상이 생기면 바로 수리를 해야 한다. 가만히 두었던 결과, 나는 또 다른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번엔 화장실이 문제였다. 우리 집은 화장실이 꽤 넓어서 여유 공간에 연탄을 쌓아 두곤 했다.


 "어... 어... 어... 으악!"

연탄을 배달하러 온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비명소리였다.

"학생! 빨리 나와 봐"

방에서 뛰쳐나와 보니 화장실에 깔아 둔 타일 바닥이 30도 정도 푹 꺼져 있었다. 연탄은 전쟁이 난 것처럼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다행히 연탄을 나르던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무사했지만 자칫 똥통에 사람이 빠질 뻔한 사건이었다.

  

 분명 우리 집이었지만 남의 집에서 사는 듯했던 이 시기. 낡아 가는 집처럼 내 마음도 병들어 가고 있었다.

'엄마와의 사별, 두 번의 수능 시험 실패' 

이 집에 사는 동안 커다란 두 사건을 겪으며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다. 안 좋은 마음이 극에 달했던 스물한 살의 어느 여름밤. 그날도 원수 같던 여름 친구가 재빠르게 눈앞을 지나갔다. 때려도 때려도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녀석을 보며 잠시나마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마음을 고쳐 먹었다.


'사람들에게 비명만 유발하는 저 징그러운 녀석도 저렇게까지 살려고 하는데 이렇게 죽을 순 없다.'




 대학 졸업 후엔 고시원이나 원룸에서 생활했다. 네모 고시원이라는 곳에서 10개월을 산 적이 있다. 창문도 없고 다리만 겨우 뻗을 수 있었던 한 평 남짓한 방. 태어나 처음 그다지 크지 않은 키를 다행이라 여겼다.


 고시원 이용자 준수사항엔 다음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밥과 김치는 무료로 제공됩니다. 밥이 모자라지 않도록 뒷사람을 위해 미리 밥을 해 두세요'

'방음이 잘 되지 않으니 방 안에서는 가급적 조용히 해 주세요'

'고시원 내에서는 쿵쿵 소리가 나지 않게 걸어 주세요'


 누구 하나 어긴 적 없던 이용자 수칙. 10개월 간 머무르며 밥솥엔 밥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가벼운 합판으로 구분된 방과 방이었지만 옆방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조용했다. '쿵' 소리 안 내려고 까치발을 들고 걷던 한 아주머니의 모습은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작은 공간에 웅크리고 살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활짝 펼쳐 보이던 배려하는 마음들은 아직도 고시원 입실 확인서에 찍힌 도장처럼 남아 있다. 네모 고시원에서의 생활은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다정한 마음들도 담았던 시간이었다.


"햇살아, 우리 집에 잠깐 들어와."

공무원 시험 합격 후 땡전 한 푼 없는 내 처지를 알고 누나가 잠시동안 기거(?)를 허락했다. 어린이집 다니던 꼬맹이와 초등학교 2학년 꼬맹이가 있던 누나 집. 당시 조카들에게 가장 많이 듣던 한 마디가 있었다.

"삼촌! 같이 놉시다."

병원 놀이, 레고, 보드게임, 알파벳 놀이, 책 읽어 주기, TV 보지 않고 살기. 아이와 함께 놀아 주는 방법은 그때 전부 배웠다.


 1년 동안 누나집에 머무르다 떠나던 날, 어린이 집에 다니던 조카가 누나에게 물었다.

 "엄마! 근데 삼촌은 누구야?"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1년 간 실컷 놀아 준 사람을 이제야 궁금해하다니! 까르르 웃으며 누나집을 나왔다.




 누나 집에 얹혀 산 덕분에 돈 1천만 원을 모을 수 있었다.

'9 대 1'

야구 스코어? 아니다. 아파트를 구매하는 데 들어간 대출금 9천만 원, 내 돈 1천만 원의 비율이다. 은행 지분이 거의 전부였지만 드디어 정착 생활을 할 수 있는 집이 생겼다.


'30년 된 13평의 비둘기(가칭) 아파트'


 겉은 낡았지만 속은 리모델링 공사를 해서 깨끗했다. 하지만 이 훌륭한 아파트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말을 많이 했다.  


직장 동료 A가 물었다.

"햇살씨 어디 살아요?"

"비둘기 아파트요."

"아! 거기 기초 수급자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라 별로던데. 저는 거기 신혼집 생각했다가 대출 좀 더해서 다른 곳으로 계약했어요."


 '야!!!!'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수급자가 사는 곳? 이웃집 한 아주머니는 인사 잘하니 반찬을 나눠 주신다. 겨울이 되면 근처 복지관에서 김장 김치도 나눠 준다. 아침엔 미라클 모닝이라도 실천하듯 인근 공원에서 운동하는 모범적인 어르신들도 있다. 이런 곳이 기초 수급자가 있어 별로라고? 나는 평생 살겠다.  


 공무원이었던 A가 그런 말을 한 뒤 처음으로 생각했다.

'공무원도 정리해고가 필요하다!'

공무원이지만 공무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마음. 아마 이때부터 싹트지 않았을까 싶다. 아휴...


 집들이 차 방문했던 B가 말했다.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다가 겁나 죽는 줄 알았어요."

"왜요?"

"엘리베이터가 오래되어서 찍찍 쥐소리 같은 게 나더라고요."


 야!!! 쥐소리? 그냥 조금 낡아서 쇠 긁히는 소리에 불과했다. 내가 타는 동안 고장 한번 났다. 정말 쥐를 잡아다가 쥐소리가 어떤지 들려주고 싶었다. 아휴... (2년 엘리베이터는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우리 집 주변을 에워싼 새 아파트들 때문에 난처했던 순간도 있었다. 직장 동료 C가 물었다.

"햇살씨 어디 살아요?"

'수급자 아파트' 파동을 겪은 뒤라 살짝 머뭇거렸다.

"아... 00역 근처에 살아요."

"거기? 역세권이라 좋은 아파트 많은 곳인데. 혹시 00 센트럴 파크 살아요?"

"아니요"

"그럼, 00 그린타운 살아요?"

"아니요... 그냥 인근 빌라 살아요..."  



 비둘기 아파트 산다고 왜 말을 못 해! 비싼 아파트는 왜 영어를 쓰는지 모르겠다. 고급스러워 보여서? 한글로 바꾸면 별거 없다. 센트럴 파크? 중앙 공원이다. 그린타운? 녹색도시다. 우리 아파트영어로 바꾸고급질 거다.


비둘기를 영어로? 피.. 피존.. 섬유 유연제구나. 아휴...




 세상이 아무리 뭐라 해도 나는 13평 비둘기 아파트가 좋다. 하숙생처럼 살다가 처음으로 두 다리 쭉 뻗고 편안하게 잠들었던 곳이니까. 우리 집은 겉은 약간 추레해도 속은 리모델링깨끗한 새 집이다. 그냥 새 집이 아니다.


어떻게든 살겠다는 투지,

까치발 들던 배려의 마음,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던 동심.


지나 온 내 마음들이 담겼다.

이런 집은 1억이 아니라 100억의 가치를 하지 않을까.


 집을 마련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오랜 친구 D가 찾아왔다. 우리 집을 두고 말 많던 사람들 때문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파트가 오래돼서 겉 보기엔 좀 낡았어."

진한 사투리를 섞으며 D가 말했다.

"치아뿌라 마. 속은 좋네! 그람 됐지!"


'이게 정답이지!' 싶었다.

속이 좋으면 됐지 뭐. 껍데기 보다 우리 집에 스민 마음들을 기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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