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진 않지만 커피콩을 갈 때 그라인더 속엔 천둥 번개가 친다. 분쇄되는 커피 입자들이 마찰 전기를 일으켜 생기는 현상이다. 번개 치며 만들어진 커피 잔 앞에 마음에도 전기가 일어나길 바라는 남녀가 있다. 만남 직전엔 '이번엔 잘 될까?' '어떤 사람일까?'라는 기대감도 있었을 터.
이것은? 20대, 30대 초까지의 소개팅이다.
30대 중반부터의 소개팅은 조금 다르다. 전기? 에너지의 한 유형일 뿐 마음에서 생기는 전기는 없다. 설렘?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 두고 온 지 오래다. '괜찮다' 싶은 사람은 대부분 품절되었음을 인식한다. 그 결과, '이번엔 잘 될까?', '어떤 사람일까?'라는 기대감은 '이번에도 안 되겠지만 혹시 모르니 만나 보자', '이상한 사람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로 바뀐다. 설렘이나 기대감의 저하는 '조건'으로 보완하게 된다. 자동차나 집 같은 조건말이다.
삼십 중반을 소환해 보자. 나는 소개팅할 조건을 충족했던가? 조건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민망하다. 공무원이라는 타이틀 말고는 집, 자동차, 돈 어느 것도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도 만나지 말자'라고 다짐했다. 근데 사람 마음이란 게 어디 내 의지대로만 되는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개팅에 참전했다. 결과는? 준비가 덜 되었으니 '역시나' 100전 100패였다. 단, 승리 같은 패배도 몇 번 있었다. 졌지만 잘 싸웠다랄까.
# 영원히 운동 중인 A
"어머, 말씀 재밌게 잘하시네요."
가진 건 말주변뿐이라 그날도 소개팅 분위기는 좋았다. 눈웃음이 매력적이었던 A. 집에 갈 때쯤 웃으며 말했다.
"저는 재밌는 사람이 좋더라고요. 앞으로도 연락하고 지내요. 호호."
그린 라이트구나 싶었다.
문제는 커피숍을 나설 때였다. A가 말했다.
"집엔 어떻게 가세요?"
"저는 지하철 타요."
"아.. 그래요?"
말끝 흐리는 A의 모습이 약간 이상했다. 나는 금방 눈치챘다.
'내가 뚜벅이인 게 싫구나.'
차를 구입할 형편이 아니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모은 돈도 없었고, 대출도 잘 안 될 때였다. 약간 씁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래도 혹시 몰라 문자를 보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아. 지금 헬스장에서 운동 중이에요. 끝나면 연락드릴게요. :) '
며칠을 기다려도 연락은 없었다. 그녀는 쉬지 않고 계속 운동을 하나 보다. 지금까지도.
'뚜벅이' 사건으로 종결된 소개팅에 형은 '차 없는 게 불편하면 업어서라도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라고 말하지 그랬냐며 장난을 쳤다. 누나는 '차 없다고 그런 태도 보이면 사람됨이 글러 먹었어.'라고 말했다. 에잇! 레트로 감성들! 틀린 말은 아니다. 누나와 형이 연애했던 90년대 말에서 2000년 초반의 연애엔 맞는 말이었다. 단지 지금 기준에 맞지 않을 뿐.
결과와 상관없이 소개팅을 주선했던 동생에게 전화했다.
"고맙다. 덕분에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 보냈어."
"형! 좋은 사람 분명 있을 거예요. 저 봐요. 차 없어도 연애 잘만 하잖아요."
경고!! 경고!!
이건 실언(?)이다. 소개팅을 주선했던 동생도 나처럼 형편이 어렵다. 차이점이 있다면 훈남이라는 점이다. 수많은 여성이 '혹시 저 사람 여자 친구 있어요?'라고 내게 물어보는 훈남말이다. 그의 여자 친구가 '내 차 같이 타면 되니까 괜히 돈 쓰지 마'라고 했을 정도면 더 말해서 무엇하리. 거기다 녀석은 마음까지 착하다. (쳇! 더러븐 세상!)
뭐 아무튼. A에게 다시 문자를 보내야겠다.
'만나자고 안 할 테니 이제 운동 그만하고 쉬어요.'
# 청문회를 열었던 B
지인의 소개로 진행된 B와의 소개팅.
"저는 돈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B의 말에 '이 사람이다' 싶었다. 호감이 생겨 자연스레 길게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던 중 B가 말했다
"예전에 연애할 땐 내가 꼭 주도권을 쥐어야 해서 상대를 귀찮게 했는데 나이가 드니 그런 마음이 옅어진 것 같아요."
슬쩍 멈칫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넘겼다. 문제는 다른 대화로 넘어간 잠시 뒤.
"본인은 고집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 질문은 뭐지? 어떻게 답해야 하지?'
갑자기 청문회에 출석한 느낌이었다. 고집이 없다 말하기도 좀 그랬다. 살다 보면 소신이 필요한 부분도 분명 있으니까. 잠깐! 좀 전까지 연애에 주도권을 쥐었다고 말했고, 지금은 고집 유무에 대해 물어본다?
'아직 내가 원하는 대로 연애해야 하니 넌 고집 꺾어!'
난 왜 그렇게 들렸던 걸까. 약간 망설이다 애매하게 대답했다.
"소신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죠."
괜히 왜곡된 해석을 했구나 싶어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고집 있어요?'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뭐 그래도 한 번만 만나고 사람을 어찌 알까 싶어 문자를 보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네. 더 만나 봐야겠죠?'
이상한 의문형에 섬뜩함이 느껴져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결국 B와의 소개팅도 그렇게 끝났다.
# '맘스 0치'에서 만난 C
30대 중반 이후 유일하게 애프터 신청까지 성공해서 두 번째 만남까지 가졌던 C.
"햇살씨의 재밌고, 러블리한 느낌이 좋아요."
이런 달달한 말까지 했던 C와는 거의 연인이 될 뻔한 위기(?)까지 갔다. 두 번째 만남은 간단히 밥 먹고 영화를 보기로 한 코스.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 고민하던 중 C가 말했다.
"저 햄버거 좋아하는데 영화관 근처에 있는 맘스 0치 가요."
햄버거? 뭐 고민하지 않고 간단히 저녁을 해결할 수 있어 나쁘지 않았다. 영화를 관람한 후 집으로 돌아가면서 C에게 말했다.
"우리 담에 볼 땐 말 놓기로 해요"
"응, 오빠. 좋아!"
바로 말을 놓아 버린 맹랑함에 C가 귀엽게 느껴졌다. 이번에야 말로 그린 라이트?
깨톡! 집에 돌아오자마자 C에게서 문자가 왔다. 문자 확인 후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빠! 미안한데 엄마가 띠궁합이 안 맞다고 해서 계속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 좋은 사람 만나길.'
이거 뭐지? 싶었다.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 바로 '띠'를 물어보는 게 뭔가 이상했다. C는 약속 장소였던 '맘스 0치'처럼 아직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였다. (아휴..)
지나간 소개팅을 떠 올리다가 문득 대학교 때 수강했던 심리 수업이 생각났다. 당시 교수님은 꽤 난해한 과제를 냈다.
'자신의 장단점을 100가지씩 찾고, 그 이유를 적어 제출하시오'
여기저기 원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교수님! 단점은 금방 찾겠는데 장점 찾기는 너무 힘들어요."
정말 어려웠다. '착하다, 성실하다, 책임감 있다'를 적고 나니 더 이상 장점이 없는 것 같았다. 거기다 이유까지. 그러자 교수님이 말했다.
"여러분! 단점처럼 보이는 것도 뒤집어 생각하면 장점이 될 수 있어요."
교수님은 지난 학기 수강했던 한 학생의 사례를 들었다.
- 장점 : MT 가면 3일 동안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지 않는다.
- 이유 : 민박집 아주머니가 화장실 청소하는 수고로움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
학생들은 '와! 그럴 수도 있구나' 공감하며 더 이상 힘들다고 투정하지 않았다.
꽤 힘들었던 대학 과제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지나치게 조건만 중시하는 소개팅이나 연애가 맞는 걸까?'
내 조건에 완전히 부합하는 상대 찾기는 100가지 장점 찾기만큼 힘들다. 결혼까지 생각하는 연애를 한다면 미리 고민해 볼 문제가 있다.
'결혼한 부부가 자주 다투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꽤 단순하다.
'속옷과 겉옷을 구분하지 않고 빨래통에 옷을 담아서',
'자기 취미는 챙기면서 아이들과 잘 놀아 주지 않아서'
'살은 자꾸 찌는데 건강에 신경 쓰지 않아서'
'씻지 않고 침대 위를 올라와서'
'예쁘다, 멋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아서' 등등
이런 사소한 갈등을 해소할 방안은 뭘까?
생활 습관을 조금 바꾸거나 빈 말이라도 약간 달콤하게 하면 된다. 이를 위해선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 생각하듯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어렵다고? 큰 위기 없이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에 따르면 그리 힘든 일도 아니다. 배우자에게 꽃다발 건네면서 "꽃집을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보다 예쁜 꽃은 없더라.", "자기는 이 넥타이 할 때가 제일 섹시해." 이렇게 한 마디 툭 던지면 그만이다.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가끔씩 미친 척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것. 그게 유연한 사고다.
내 조건에 맞는 완벽한 사람은 없다.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서늘하게 인정하고 상대에게 원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게 더 현실적일 수 있다. 내겐 그 조건이 '유연한 사고'다. 약간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대단하진 않다. 하지만 이 작은 생각이 상대와 '함께 하고픈 마음'을 만들어 낸다. 혹시 유연한 사고에 더해 '띠궁합'까지 맞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잊지 말자. 조건을 하나, 둘 보태면 사람 만나는 일이 '장점 100가지 찾기' 같은 난제가 된다.
누군가 잔소리를 할 것만 같다.
'유연한 사고? 소개팅(연애)하는데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어? 느낌이 우선이지!'
인정한다. 그래서 소개팅은 나와 잘 안 맞는 것 같다. 늘 그랬듯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가 답인 듯.
사이다 선생 왈: 유연한 사고 따위나 생각하다니! 순진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