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혼자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책은 나를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세계를 고요히 열어 펼쳐주는 안내자였다. 활자화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마음을 기대어 조용히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책을 펼친 순간 그 안의 세계에 몰입되는 경험이 지금의 나를 소설가로 이끈 것 같다.
인생의 주기를 차례로 경험해 가면서도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만큼은 한 차례도 내게서 비켜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 세계로 성큼 건너가기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던져놓지도 못했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과 더불어 해결해야 할 현실의 문제들과 생계와 또 다른 내적인 욕망들이 서로 상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이제는 더 이상 늦추면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소설가의 길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기 시작했다. 신춘문예와 문예지 신인상 공모전에 전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임하기로 하면서 소설을 써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은 꼭 등단을 거치지 않아도 소설가로서 왕성히 활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다른 경로를 모색하기 어려웠다. 그때 나는 준비를 해나가면서 혹시 등단을 하게 된다면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심 품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모두 그곳 신춘문예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강, 하성란, 강영숙 같은 작가들이 그랬다. 그들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 안의 이야기와 문장과 사유가 내 마음을 꿰뚫고 지나가곤 했다. 그 책들 속의 이야기와 문장과 사유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생동하며 가슴 뛰게 했었으니까. 좋아하는 작가들의 기사를 모아 스크랩해둔 신문 기사들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 정도다. 뒤돌아보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 중, 내 가슴속에서 팔딱팔딱 살아 숨 쉬고 있던 건 오로지 조금의 글을 쓰는 것과 책이 유일했던 것 같고, 그런 생각을 하면 어쩐지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어쩌면 나의 인생 일부는 소설과 상관없이, 때로는 그것에서 벗어나 존재하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곁에 두고 함께 흘렀고 그런 흐름이 내가 소설가가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글이, 소설이 내의 삶 안쪽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건, 소설 그 자체가 그저 좋아서가 아니라, 인생이 나에게 그 세계를 껴안고 가라며 등을 떠민 것 같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생각은 소설가가 된 이후로도 꽤 오래 했다. 소설가로서 글을 쓰기 전까지 인생이 내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 바늘을 내내 고정해 둔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면 글을 나만의 자족으로만 여기기 어렵게 되는 것 같다. 거기엔 어떤 의미가 있고 나는 그 의미를 채워나가야 한다는 의식이 들기도 한다. 이 세상에 뭔가 의미 있는 것을 건네고 채울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도구이자 수단이 글쓰기 밖에는 없음을 나는 이제 받아들인다.
운이 좋게 등단하고자 했던 그 지면에서 당선되었을 때는, 기뻤다. 시상식 날 프레스 센터 건물로 들어가기 전 내게 머문 햇살이 그렇게 달라 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건 내가 뭔가를 이뤘다거나 가졌다기보다는 어딘가에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쁜 숨이 그 말간 햇살 속으로 토해졌을 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기쁨이 그렇게 오래가진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의 길에 대한 불안과 염세 의식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고, 내가 끝점에 선 게 아니라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선 것이라는 자각이 찾아들었다. 그 이후부터는 모르긴 몰라도, 아주 깊고 오랜 마음고생이 시작된 것 같았다. 그건 아주 좁은 문으로 들어선, 막다른 길에 몰려 뒤를 돌아봐도 닫힌 벽뿐인 채 고립된 느낌과 다르지 않았다. 당장의 현실을 살펴봐도 그 길이 녹록지 않을 거라는 징후들이 곳곳에 매설되어 있었다.
등단의 경로를 통해 나서게 되면 주로 문예지 등에 단편 소설을 발표하고 그에 대한 비평을 받으며 활동을 이어가는 형태가 보편적이다. 하지만 반대로 문예지나 매체에서 청탁을 받지 못하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알릴 수도, 비평을 받을 수도 없어 소설가로서의 활동이 위축되기 마련인데 내 경우가 그랬다. 앞서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기 작품 세계를 확장해 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좌절에 이르는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에 등단한 다른 소설가들이 차곡차곡 각종 문예지와 매체에 작품을 발표하는 걸 보면서 아, 왜 난 선택받지 못했을까 하는 상대적인 박탈감이 꽤 컸던 것도 같다. 이러다 등단하자마자 사라진 작가가 되는 건 아닐까, 그런 불안과 공포가 매일의 나를 좀먹던 시절이었던 것도 같다. 벼랑 끝에 매달려 힐끔힐끔 절벽 아래를 쳐다보는 처지에 몰려 있던 게 그 당시의 나였다. 그 시절 소설가로서의 앞길을 생각하면 그 길은 틈이 보이지 않는 좁은 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한 출판사 관계자분을 우연히 어떤 자리에서 동석하며 만나게 되었다. 듣기로는 그 출판사에서도 꽤 큰 영향력이 있는 분이라고 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긴장되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처음에는 화기애애하게 분위기가 이어졌는데 사람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몇 명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관계자분과 조금 더 밀접하게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분이 대뜸 자신에게 내가 그동안 써왔던 단편 소설이 있다면 세 작품 정도를 차후에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 말의 뉘앙스를 더듬어 보니 세 작품 정도를 살펴보고 어느 정도 괜찮다 싶은 소설이 있다면 출판사 출간물에 소설이 실릴 수 있도록 추천해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나를 생각해서 해준 말이었을 테지만 그때의 분위기 속에서 그분의 말은 다소 위계적이면서도 모호하게 들렸다. 그래서 확답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분이 이번에 다시 한번 내게 말을 건넸다. 세 작품이 아니라 작품 하나로 줄여주겠다고. 자신한테 메일로 보내면 그 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면서 같이 살펴보자고.
그때 나는 조금 그 상황을 버겁게 느꼈는데, 소설의 좋음과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인적인 관계의 정도에 따라 소설을 추천해 줄 수도 있다는 듯 들린 그 말로 인해서였다. 여전히 나를 생각해서 해준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려 했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글쓰기 그 자체보다는 다른 요소를 위해 애를 써야 그나마 인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맥이 풀려버렸고.
순간 나는 또다시 막다른 길에 몰린 듯한 공허함과 벽을 느꼈다. 명확히 뭔가를 규정하기에는 이미 불콰하게 술을 나눠 마신 자리였고. 그분 나름의 호의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어 나는 대답 없이 그저 웃음만 짓고는 그날 끝까지 자리에 남았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길, 착잡하고 허기진 마음으로 답답한 속을 풀어낼 곳이 없어 그런지 호흡은 답답하고 불편했다. 이런 식으로 소설가로서의 길이 끝나고 마는구나 싶은 불안한 예감과 이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내 머릿속에 꽉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차창 밖에 자잘하게 흩어지는 싸락눈을 보며 생각했던 것 같다. 장편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 하지만 이대로 좌절감 속에 소설가의 길을 마감하고 자포자기하느니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1차선으로 된 길이 정체되어 있다면, 2차선으로 차선을 옮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소설가로서의 길을 이어가자면 우선 차선을 바꿔 달려봐야겠다고. 그 2차선의 길이 내게는 장편소설을 쓰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장편소설을 써본 적이 없었다. 단편 소설 하나 쓰기도 힘이 드는데 어떻게 장편을 쓰나, 생각을 하자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이대로, 이대로 끝낼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차창에 하얀 눈의 알갱이가 하나 달라붙었다. 눈송이는 끈덕지게 창에 붙어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붙어있는 매달려 있는 눈의 끈질긴 부력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그 밤, 내게 어떤 생명력이 찾아들었던 게 아닌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